역사의 바깥18 생민(生民)
채광석
독립이든 혁명이든 전쟁이든
제때를 못 만나면 제때에 뒤집지 못하면
생활이 되고 생계 방편이 되어
운동가와 혁명가와 병사들은
제 생민들 피를 빨아대는
토비가 되거나 비적이 된다
지나간 것들은 역사란 이름으로
몇몇 영웅들과 사건들만
오색 만국기처럼 걸어놓지만
그 만국기가 정말 완벽하게 정의로운 것인지
역사가 벌컥벌컥 들이마신 피가
정말 완벽하게 선량한 것인지
난 정말 수상하다 의심스럽다
제국군이든 독립군이든 혁명군이든
서로 맞총질한 만큼이나 제 생민들에게도
의연금이니 인구세니 보호세니
밀정이니 반동이니 총동원이니
총부리를 거꾸로 겨누고 고혈을 짜댔는데
아 누가 알리 이런 것들은
이 땅 저 땅에서 죽어간 생민들과 함께
이미 오래 전 흙에 묻혀버린 걸
그래서 신채호가 새벽 창의에
교시 받지도 말고 교시 하지도 말고
생민 스스로가 알아서 일시에 다 들고 일어나자는
생민 본위 혁명론 같은 걸
각혈하듯 칵, 내뿌렸는지 모른다
채광석 시인. 1968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재학 중인 23세 때 등단했다. 하지만 등단은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등과는 화려함의 결이 전혀 다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에 절필을 한 후, 나이 쉰이 넘은 지난 2019년 2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펴냈다. <오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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