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10 돌아오지 못한 시
채광석
내가 아는 한 동생은
스무 살부터 죽어라 시를 썼고
스물일곱 되던 해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로
봄날 화관처럼 얼굴 내밀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 뒤로 시는 안 쓰고 돈만 빌려달랬다
무작정 일본으로 중국으로 떠돌더니
십 년 만에 독립군 잔당처럼 불쑥 나타나
돈도 안 갚고 당연조로 말했다
형님 나 배고프우 취직 좀 시켜주오.
시는 죽어도 안 쓰고
입시생들 논술 답안지 첨삭만 죽어라 하며 살더니
마흔 살 되던 해 늦가을 불쑥 사표를 내던졌다
형님 나 결혼도 하고 애도 생겼으니 이제 가우
그 사이 난 사업도 접고 병도 찾아와
동네 앞산 뒷산만을 소요했는데
봄 산행에서 만난 어느 꽃바람을 잘못 쏘였는지
번역사로 살고 있다는 그에게
문득 안부 전화를 하게 되었다
형님 나 문학병 도지면 우리 식구 다 굶어 죽으니
다신 서로 연락하지 맙시다.
한 이십여 년 시 안 쓰다가
이제 시나 쓰며 살아보자 꼬드긴
나도 참 가벼운 개새끼였다
채광석 시인. 1968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재학 중인 23세 때 등단했다. 하지만 등단은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등과는 화려함의 결이 전혀 다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에 절필을 한 후, 나이 쉰이 넘은 지난 2019년 2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펴냈다. <오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열린순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