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근현대사]노일환-민족정기 회복에 앞장선 소장파 제헌국회의원
상태바
[순창근현대사]노일환-민족정기 회복에 앞장선 소장파 제헌국회의원
  • 안욱환 주민자치분과위원
  • 승인 2023.09.20 0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욱환 순창희망포럼 주민자치분과위원

순창과 관련된 근현대사를 하나씩 짚어봅니다.

제헌의회 당선 직후 노일환 의원. 유족 노시선 제공

 

노일환(1914.4.3.~1982.5.10)은 풍천노씨 집성촌인 순창군 쌍치면 운암리에서 송계 노병권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광복 후 1948510일 실시된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인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순창군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어 국회에 입성합니다.

그의 집안은 유력한 가문으로 쌍치면 최초로 교육시설을 설립하였고, 그의 동생은 일제강점기 때 ‘5인 독서회 사건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노국환(1923~1987)과 순창군 노인회장을 역임한 노영환(1927~2013)이며, 노형욱 전 국토교통부장관은 그의 5촌 조카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고 1936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입사하고 35세인 1947년 제주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이 제주도민에게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며 촉발된 제주 4·3사건을 직접 취재해 생생한 현장을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제헌국회, 전북 최고 득표율로 당선

개혁파 선두, 국가보안법 위반 체포

이와 같이 노일환은 식민지 시절부터 해방된 이후까지 전국을 누비면서 주권을 상실한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고, 이런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민을 하던 중 마침내 한국민주당(한민당)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지역구를 순창으로 정하여 제헌국회에 출마하게 됩니다.

제헌국회 선거에서 그는 전북에서 최고 득표율인 73%로 당선되고 1년 후인 1949620일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되기까지 국회에서 농지개혁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 법안을 제출하는 등 활발하게 의정활동을 합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국회의원(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하여 노일환, 이문원 등) 13명을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한 사건입니다.

당시 진보적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미국, 소련)의 완전 철수,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하자 이를 불온시한 이승만 정권이 증거를 조작하여 빨갱이로 몰고 간 것입니다.

촉망받는 개혁파의 선두 주자인 그의 발목을 잡은 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울지방법원이 그에게 징역 10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노일환 의원은 고등법원에 항소합니다. 동시에 동료 의원들도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서명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이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이들을 전원 석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지만 더 이상 서울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이들은 대부분 인민군이 후퇴할 때 월북(또는 납북)을 하게 되고, 이런 그의 행적 때문에 남한에서는 그에게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박갑동 노일환은 빨갱이가 아니었다

노일환·국환의 부친 송계 노병권(오른쪽 두 번째)이 5인독서회 사건으로 수감된 3남 노국환을 함흥형무소에서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설악산에서 1941년 찍은 사진.

 

노일환 의원을 간첩으로 구속한 이 사건을 필두로 이와 유사한 많은 간첩 조작 사건들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 독재정권에서 계속 발표하고, 이들 조작 사건들은 나중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법원에서 줄줄이 무죄로 판명됩니다.

이들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은 이미 있는 형법만 가지고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어서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도 폐지할 법 목록에 넣었으나 독재 정권의 반대로 무산되어 지금까지도 정권에 비판적인 국민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80년에 민주화되면서 폐지된 연좌제를 독재 정권이 도입하여 억울한 민주인사들의 가족들까지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노일환 의원에 대한 평가는 그는 민족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며, 그를 지켜본 주위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그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 당시 국회프락치사건에 관심을 갖고 직접 재판정까지 찾아가 방청을 하며 기록을 남긴 이는 주한미군 대표부 부영사인 그레고리 핸더슨(1922~1988)입니다.

핸더슨 부영사는 훗날 정치학자가 되어 1981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노일환의 소식이 궁금해서 수소문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언론인 박갑동을 만나 그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노일환 의원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한 줄의 문장으로 자신의 안타까운 감회를 말합니다.

한때는 이승만의 미움을 사고 이제는 김일성의 포로가 되어 있는 그의 불운한 운명 앞에 나는 망연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김정기, 그레고리 핸더슨 평전)

그리고 1957년 북한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박갑동은 노일환은 빨갱이가 아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노일환 의원에 대해 대쪽 같이 꼿꼿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한민당의 핵심이고 김성수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분으로 기억합니다.

6.25 직후에 박갑동이 평양 거리에서 우연히 노 의원을 만나서 그간의 사정을 듣고 프락치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6.25 때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 납북되었다고 하면서 만약 이승만이 그를 정적으로 여겨 간첩으로 몰지 않았다면 남한에서 위대한 큰 정치가가 될 인물이라며 아쉬워합니다.

 

반민특위 특별감찰부 차장 맡아 활동

제헌국회 속기록에 나오는 그의 발언을 보면 노 의원은 개원 초기부터 논리적이며 개혁적인 발언을 하여 듣는 이들은 그의 명석함과 애국심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한 대목도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국회에 출석한 이승만을 천황에 비유하면서 당당하게 발언하는 모습은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역할인 것입니다.

광복 후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이런 국민적인 합의에 따라 제헌국회는 19489월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활동에 돌입합니다. 반민특위의 특별감찰부 차장이 된 노 의원은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데 열정적으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반민법이 공포된 다음날부터 친일 인사들은 정부의 비호 아래 특위의 활동을 반공궐기대회 등을 열어 방해하는 공작을 합니다. 특히 이승만은 5차례나 담화를 통해 친일파를 척결하는 정당성을 무력화하려고 시도하였고, 결국 19495월 국회프락치사건과 그 뒤를 이어 66일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일으켜 결국 반민특위를 해체합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등 과거를 청산하고 희망찬 대한민국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기회가 좌절됨으로써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득세하고 그 결과 민족공동체 안에 옳은 일에는 앞장서고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가 크게 훼손되고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사회에 부정부패가 사라지지 않게 됩니다.

 

친일인명사전4389명 친일인사

민주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북의 평화는 위태해지고 분단이 고착화되며, 일신의 영달을 위해 강대국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들이 저지르는 불법이 난무하지만, 반면에 깨어있는 시민들이 권력에 저항하는 자랑스러운 역사적인 전통이 있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지역 순창에서 태어나고 고향인 순창군 지역구에서 선출된 제헌국회의원 노일환의 좌절은 대한민국 국민이 열망하는 친일파 척결의 좌절입니다. 지금도 냉전 이념으로 대한민국을 분열시키고 헌법정신과 상식을 뒤집는 친일 후손들이 민주공화정을 과거 독재 시절로 되돌리는 헌법에 반하는 시도가 여전히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이유는 청년 노일환이 꿈꾸던 나라가 아직 미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월북한 사실 때문에 그에게 씌워진 편견은 잘못된 오해이므로 그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려는 노력을 우리 고장에서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한편 당시 반민특위의 해체로 7000여 명의 반민족행위 혐의자 중에 제대로 처벌받은 친일파가 한 명도 없지만 그 뒤에도 국민들이 계속해서 친일 청산을 요구하여 2004년 국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4389명의 친일인사의 행적을 기록한 친일인명사전2009년에 발간합니다.

개혁적인 사상으로 독재와 싸운 노일환 의원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또 역사를 부정하는 친일 세력을 몰아내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