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나온 아들의 손을 잡는다. 잠깐 몇 걸음 걷는데 뒤에서 아내가 남편을 부른다. 얼른 눈치를 챈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놓고 뒤처져 걷는다. 기다렸다는 듯 며느리가 아들 곁으로 간다. 신혼인 아들과 며느리가 늘 손잡고 걷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았던 아버지. 오랜만에 아들의 손을 잡는 것이건만 손 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미처 잊었다. 그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진다. 손잡고 걷기 익숙지 않은 세대. 그 세대의 걸음이 문득 헛헛해진다.
올해는 꽃이 더디다. 그러나 준비 땅! 모든 봄꽃들이 모두 함께 필 조짐을 하는 것 같다. 꽃이 피면 무엇 하리, 꽃이 피면 무엇 하리. 사월혁명을 비통해하던 시인의 절규는 6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 어찌 기억으로 남아서 새로운 외침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정말 꽃이 핀들, 한꺼번에 꽃이 핀들 내 무엇 하리.
이탈리아 피아니스트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타계했다. 2024년 3월 23일. 향년 82세. 40여 년 전, 오디오 가게에서 기기시험용으로 함부로 굴린 흔적이 역력한 시디(CD)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앰프구입 대가(?)로 그 시디를 달라는 내 요구를 사장이 선뜻 응해주었다.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쇼팽의 <전주곡(Prelude)집>이었다. 가게 사장에게는 별 것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더없이 소중했던 마우리치오 폴리니 연주의 음반이었다. 청취조차 열악했던 시기에 쇼팽의 전주곡 전곡을 그의 연주로 익혀 들었다. 그때 산 오디오는 고물이 되어 없어졌지만 그 시디만큼은 제 자리(?)를 아직도 잘 지키고 있다.
밤이 깊었다. 비가 내린다. 고인이 연주하는 쇼팽의 ‘야상곡(Nocturnes) 1번’과 ‘전주곡 15번, 빗방울’만 듣기로 했다. 이 봄, 어디선가 꽃은 피는데 먼 길 떠난 이가 남긴 음표들이 내 가슴에 사태 져서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