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쪽빛한쪽(23)가을 날 하루-이 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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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쪽빛한쪽(23)가을 날 하루-이 나이에
  • 선산곡 작가
  • 승인 2023.10.2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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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곡 작가

 

주방 찬장에 달린 라디오수신기가 드디어 고장이 났다. 뜯어서 해체를 해봤더니 편작(扁鵲)이가 와도 고칠 수 없는 상태였다. 며칠 그 공간이 크게 비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관성(慣性)때문이었다. 물체가 아닌 소리도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서둘러 새 수신기를 산 것은 아내의 성화 때문이었다.

일요일 아침, 새로 산 수신기에서 포레파반느(Pavane,Op.50)’가 흐르고 있다. 눈 뜨자마자 듣게 된 음악이 하루의 분위기를 예견해 줄 때가 있다. 오늘은 이성을 찾되 조금 촉촉한 감성을 누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정말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전화기의 울림이 모든 의식을 정지시킨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끝날 때까지 참는다. 다소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 난 뒤 전화기 수신을 진동으로 바꾸어 놓은 지 벌써 나흘째다. 주변 사람들과 감정이 엇갈리는 광장에 다시 서지 않겠다는 오기(傲氣)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이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까. 내가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을 그는 알 것이다. 그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의 잘못이겠지.

이 나이에. 이 나이에 이런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은 다 내 잘못이라는 자책이지만, 조금은 후련하고 조금은 서글프다. 거기에 분노 약간. 이웃과의 관계를 이렇게 접어야 하는 각오가 분노를 동반한다면 슬픈 일이다. 이 나이에. 이 나이에 불편함을 정리한다는 관계(?)가 그렇게 편한 것만은 아니다.

오전 10, 커피 만드는 시간이다. 시작에서 끝까지, 과정은 복잡하지만 순서대로만 일을 치른다면 딱 5분이면 된다. 두 개의 잔에 얼음을 먼저 넣고 하나엔 우유를, 또 하나엔 물을 붓는다. 거기에 마지막 커피 원액을 부으면 끝이다. 그중 뼉따구 땜시 우유를 섞은 커피는 내 몫이다. 아내에게 얼음커피 잔을 건넨다. 아내가 마늘을 까다 잔을 받아 들며 하는 말이 여느 때와 똑같다.

땡큐!”

영어도 잘 혀.”

늘 그렇게 주고받는다. 이렇게 커피를 만드는 일은 평생 내 몫이 되었다. 외출을 하는 날만은 예외다. 장을 보거나 외식을 하거나, 외출이 예정된 날이면 카페에 가는 코스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오늘은 왼 종일 집에 머물러 원고를 써야 한다. 필사적이라는, 고통의 하루가 될 것이 분명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고향 강천산 단풍은 아직 이른 모양이다. 해마다 해 온 나들이, 다가오는 목요일 새벽이면 괜찮겠지. 그 안에 서글픈 이 분노는 씻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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