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쪽빛한쪽(26)또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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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쪽빛한쪽(26)또 다른 것
  • 선산곡 작가
  • 승인 2024.03.0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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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넘도록 날이 흐렸다. 말로만 듣던 북구(北歐)의 하늘이 저럴까 싶어 찾은 시벨리우스의 피아노 즉흥곡. 도깨비방망이로 새 커피콩을 갈면서 뜻밖에 우울함이 가신 것은 집안에 나직하게 깔릴 커피 향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이소에 가서 1500원짜리 드립용 여과지를 사야할 때가 되었다는, 이 하찮은 목적이 우수(雨水)철 우수(憂愁)를 견디어 낼 수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단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았다. 그 몽그작거림이 겨울 내내 지속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 펴낸 수필집을 이웃에 보내는 것조차 손 놓아버린 지 오래고 책 한 권 읽지도 않았다. 세월이 덧쌓이는 무게에 지친 것인지 나태(懶怠)가 웬만한 욕구를 지배해버린 셈이다. 굳이 그것을 여유(餘裕)라 한다면 핑계.

전화에서 울리는 소리가 두려워 꺼 두기 버릇이 들었고 외출을 할 때도 아예 지니고 다니는 것조차 삼가했다. 어느 날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전화기 하나에 속박된 나를 발견한 탓도 있었다. 이제 그 속박의 조바심에서 벗어나 얻은 것이 있다면 소통(疏通)이 어렵다는 악명(惡名). 지금 그 언저리에 있다.

컴퓨터 기본화면에 올린 그림을 사진으로 바꾼 것은 1월초였다. 초겨울에 그린 삭막한 겨울풍경을 꽃 사진으로 바꾼 것은 봄을 기다리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20여 년 전, 디에스알엘(DSRL) 카메라로 수수꽃다리꽃을 접사로 찍은 작품이었다. 컬러를 일부러 흑백으로 바꾼 그 사진을 마치 살아있는 양 겨울 내내 바라본 셈이었다.

문득 내가 사진의 꽃잎을 세고 있었다. 그 멀리 지나가 버린 날의 꽃잎을 나도 모르게 세고 있는 것은 분명 부질없음이었다. 이 부질없는 행위는 계절에도 맞지 않았고 생각에도 맞지 않았다. 그때의 향기를 음미했던 사람 모두 내 곁에서 지워졌는데. 평생 가면 했던 뜻이 그냥 그런 것이지, 현실을 관통하는 글 한 편 쓰지 않았고 이웃의 고통을 외면했으며 한숨 섞인 글 따위나 깔짝깔짝 썼다는 자괴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부질없음에 시선을 주는 부질없는 짓. 속박을 벗어나야 할 또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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