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10) 박영종 복흥 동서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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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10) 박영종 복흥 동서마을 이장
  • 장성일ㆍ최육상 기자
  • 승인 2021.11.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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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자’로 자수성가, 선산 있는 복흥으로 귀농
박영종(72) 이장과 설봉숙(68) 부부

한 복흥 주민이 참 좋으신 이장님이 계시는데 취재하면 좋겠다<열린순창>에 박영종 이장을 추천했다. 첫 통화 이후에 일정이 몇 차례 어긋났다. 박영종 복흥 동서마을 이장을 만나기까지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지난달 15일 박영종 이장을 자택에서 만났다. 전남 담양이 고향인 박 이장은 서울 우정본부에서 40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국제국장으로 정년퇴직하고 복흥에 터를 잡았다.

맨 처음에는 체신부였어요. 정보통신부로 갔다가 지금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우정사업본부가 됐죠. 우체국을 총괄하는 본부예요. 서울 광화문에 있다가 지금은 세종청사로 이전을 했어요. 우체국에서 일하다가 우정사업본부에서 한 10년 근무했죠. 2011년에 퇴직하고 1년 반 동안은 우체국 자회사에서 근무하고 201281일 날 여기에 이사 들어왔어요.”

 

유복자로 출생, 할아버지가 출생 신고 늦게

박 이장 부친은 그가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박 이장은 담담하게 과거를 이야기했다.

제가 원래는 19501129일생 범띠인데, 주민등록상으로는 1953년으로 돼 있어요. 그 사연이 있죠. 제가 유복자입니다. 아버지가 6.25 때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가 미처 출생 신고를 못 하셨어요. 아버님 제사는 음력으로 104일이고, 제 생일은 1129일이니까 거의 두 달 차이가 나죠. 그래서 꿈에도 아버지 얼굴이 안 보여요. 허허헛.”

순창으로 오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제 어머니 고향은 담양이세요. 아버지를 비롯해서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산소가 여기(복흥)에 있어요. 제가 다서 여섯 살 먹었을까, 그 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서 여기를 왔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제가 서울 사니까 자주는 못 오고 1년에 한 번씩은 꼭 와서 벌초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저도 여기가 보금자리 말하자면 인생을 정리하는 자리가 될 줄은 몰랐죠.”

대화를 듣던 아내 설봉숙(68) 씨가 박 이장의 말을 거들었다.

남편 여섯 살 때 여기 왔다는 게, 할아버지가 손자(박영종 이장) 앞세우고 아빠 산소 잊어버릴까봐 재를 넘어오신 거죠.”

아내 설 씨는 복흥에 대한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큰애가 마흔여섯 살이에요. 큰애가 다섯 살 먹어서 여기 왔을 때, 그날이 장날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싹 다 모였더라고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어떤 할머니가 무명저고리 입고 수건 쓰고 장에 나오셨더라고요. 그 때 순 할머니들이고 젊은 사람들이 없는데, 사람들이 우리가 이상했는가봐. 무슨 창경원에 원숭이 보는 것처럼, 우리 애들 셋을 놓고 둘러서서 보는 게.”

박 이장이 아내의 말을 받았다.

그 때 밤새 기차타고 정읍에서 내려 버스 첫차 타고 여기를 들어왔죠. 산소가 보여도 거기까지는 4km예요.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그날 하필 예비군 훈련이라고 택시기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걸어간 거죠. 그랬던 것이 이제는 제가 여기 와서 살고 있는 거죠. 저도 사실 상상은 못했죠.”

아내 설 씨는 마을 장자나무가 너무 좋다고 지나다녔었는데 정말이지 저도 여기 와서 살 줄은 생각 못했다고 따라 말했다.

2008년 큰아들(뒷줄 가운데) 결혼식 때 찍은 가족 사진(1남 2녀)

 

열아홉에 청상 돼 60년간 홀로 사신 어머니

박 이장은 원래 밭이었던 집터를 15년 전에 미리 사 놓고 이사를 왔다면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는 어머니가 살아계셨는데, 유복자 키우면서 홀로 얼마나 고생하셨겠어요? 13년 됐는데, 어머니가 2008년 팔십에 작고하셨어요. 저 앞산에 한 50평 사서 모셔놓았어요. 다음달 1115일 날 이장해서 여기 계시는 아버지와 합장을 해 드리려고요.”

아내 설 씨는 시어머니 이야기에 곧바로 울컥했다.

시어머니는 혼자 사셨어도 성공했다고 봐요. 남편이 잘 됐으니까, 항상 감사드리고 우리 어머님한테,(울먹) 열아홉 살 때 청상(과부) 되셔가지고 육십 년간 어머니는 홀로 사셨죠.”

아내 설 씨는 끝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무녀독남 유복자인 박 이장을 혼자 키워주신 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부부의 자택은 너른 잔디밭에 과실나무가 여럿 심어져 있다. 손자손녀가 오면 마당에 네모난 튜브로 수영장을 만들어준단다. 집 앞으로는 전망이 확 트여 시원한 느낌이다. 집 한 쪽에는 찜질방도 있다. 박 이장은 제가 아내한테 순창에 내려오면 찜질방 만들어준다고 공약을 했다면서 날이 추워지면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찜질방을 가동한다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박 이장은 한 나무를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서울생활을 한 40년 했어요. 이 대추나무는 서울에서 화분에 20년 키우다가 가지고 내려왔어요. 복흥에 와서 한 10년 살았으니까 30년 지기죠. 하하하. 제가 집에 과일 나무를 많이 심었어요.”

부부는 12녀를 뒀다. 집안 거실에는 2008년 큰 아들 장가갈 때 찍은 가족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박 이장은 사진을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좀 창피한 이야기인데 셋이 연년생이에요. 하하하. 3년 연속으로 아기를 낳았어요. 아내가 몸도 못 풀고, 그 땐 어머님이 계셔서 도움을 주셨죠.”

 

2019년 전북대 학사학위 취득한 만학도

아내와는 언제 만났는지 물었다.

서울에 있을 때 1975년도에 만났어요. 제가 스물넷, 아내가 스무 살이었죠. 아내도 담양이 고향인데, 제 친구 같은 동네에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만나게 됐죠. 첫 애를 1976년에 낳았어요.”

자택 2층에는 박 이장의 서재가 있다. 진열장에는 각종 표창장이 많았다. 박 이장은 학사학위증을 내보이며 지금까지 제일 보람된 일이라며 대학 공부 이야기를 전해줬다.

제가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하니까 남들 보기에 편하게 보였겠지만, 1970년에 담양농고를 졸업하고 1971년에 서울로 올라갔어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대학교를 못 다닌 데에 제가 한이 좀 생겼어요. 여기 내려와서 2015년부터 전북대학교 순창분원을 다녔어요. 제가 9기 학생회장을 하면서 2019년도에 전북대학교에 가서 학생 대표로 총장님한테 직접 식품공학 학사학위증을 받았어요. 하하하. 제가 40년 동안 정말 학교를 더 다니고 싶었거든요.”

박 이장은 내친 김에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2019년도에는 기술센터 혁신대학교에 들어갔어요. 30명 정도 돼요. 2년 동안 다녔죠. 거기서는 제가 11기 학생회장을 또 했었고. 그 사연은 또 길죠. 하하하.”

2018년도에 취득한 학사학위 졸업식 때

 

“‘기업형 축사 신축 반대서명 받고 다녀요

박 이장은 2019년도부터 이장을 맡았다.

제 성의껏은 한다고 하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주민 분들께서 어떻게 느끼시는지는. 동네 분들이 참 순수하셔요. 조그만 거 하나 베풀어도 그걸 전부 기억을 하시고 고마움을 꼭 표현하세요.”

동서마을 주민은 주민등록 상 구십오륙 명, 실제 거주하시는 분은 육칠십 분 되시고, 65세 이상이 마흔일곱 분 정도 된단다. 박 이장은 아마, 우리 마을이 노인 인구가 복흥에서는 제일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이장은 초보 이장으로 최근 고민이 많다면서 주민들 서명이 담긴 서류를 꺼내 보였다.

그동안 참 좋게 살았는데, 우리 순창이 원래 '클린 순창' 아니에요? 지금은 구린 순창이 돼 버렸어요. 구린내가 어떻게나 많이 나는지, 특히 우사 때문에 축사, 지금 복흥이 들썩들썩 하거든요. 기업형 축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특히 소재지 정산리 비거, 동서, 정동 3개 마을이 피해가 제일 많죠. 지금도 날씨가 흐리거나 바람 불면 냄새가 많이 나요. 후손들을 위해서 동네 이장으로서 기업형 축사 신축 반대서명 받고 다녀요.”

부부는 대화 내내 서로에게 존칭을 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산단다. 아내 설 씨는 기자에게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박 이장을 흉봤다.

이 양반이, 아무도 없잖아요.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오빠소리를 좋아해요. ‘오빠~’ 그러면 정말 좋아해요.(박 이장 포함 일동 웃음 폭발) , 제가 아저씨~’ 라고 부르면 이 집에 아저씨 없는데시치미를 떼요. 오빠~ 그러면 또 금방 웃고. 제가 이러고 살아요. 하하하.”

형제자매 없이 홀로 살아온 박 이장은 아내의 고자질이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그는 크게 웃으며 한국 예찬, 복흥 예찬으로 말을 맺었다.

제가 현직에 있을 때는 해외연수도 많이 갔었어요. 스웨덴, 독일, 미국,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도 가 봤는데, 역시 한국이 제일 좋더라고요. 복흥만 한 데가 없더라고요. 하하하.”

 

열린순창안녕하세요? 이장님!’ 기획을 연속 보도합니다. 우리 마을 이장을 추천해 주세요. 만나 뵈러 달려가겠습니다. 이장 추천 전화 652-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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