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역사(30) 고구려ㆍ수나라 1∼4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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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역사(30) 고구려ㆍ수나라 1∼4차 전쟁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2.1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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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지나(支那중국)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드시 피차 내부 분열과 불안이 있어 각각 내부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구려는 실제로 중원 통일제국과 1 1로 맞대결을 벌였다. ()나라와 598년부터 614년까지 4차례나 대혈투를 벌였으며, 30년 후에는 당나라와 645년부터 668년까지 23년 동안 3번의 대전(645661668)과 여러 차례의 소모전을 치렀다.

우리 역사에서 영웅적 투쟁과 위대한 승리의 대명사로, 감동적인 서사드라마로 거론되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4차에 걸친 전쟁사를 소개한다.

살수와 북평양성 위치
살수와 북평양성 위치

 

전쟁 전야

남북조시대(420~589)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서기 589년 중원을 통일한 인물이 수()나라 문제(文帝)였다. 그는 597년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 영양왕(嬰陽王재위 590~618)을 협박한다. 고구려왕을 내쫓고 다른 관리를 보내겠다는 망발을 하는가 하면, 요수(遼水)의 너비가 장강에 비하면 어떠하다고 생각하며, 수나라가 멸망시킨 남북조시대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나라와 고구려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인구가 많다고 생각하느냐는 등 수나라의 강대함을 내세워 고구려의 굴복을 강압했다.

 

고구려의 선제공격과 제1차 전쟁

수 문제의 국서에 대한 영양왕의 답변은 수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5981월 영양왕은 1만여 명의 기병을 직접 이끌고 수나라 전초기지 영주(오늘날의 조양 근처)를 들이쳐 수나라에 강한 타격을 주었다.

수 문제는 이것을 구실 삼아 즉각 자신의 아들에게 수륙군 30만을 주어 바다와 육지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수서고려전이나 자치통감에는 육군은 장마로 후방공급이 끊어진 데다 전염병까지 창궐해 숱한 군사들이 죽고 겨우 요하에 이르렀으나, 더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수군은 폭풍을 만나 많은 함선들이 침몰해 9월 기축일(11)에 되돌아 왔다고 한다. 이 때 죽은 자가 열중에 여덟, 아홉이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자연재해 탓에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을까? 자연재해 때문에 열에 아홉이 죽는 일은 없다. 중국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패전을 축소하거나 숨기는 춘추필법을 일삼고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나라군은 요서지방과 요하계선에서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숱한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으며, 수군은 고구려 수군의 반격을 받아 숱한 배를 잃고 장성계선까지 쫓겨 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30만 대군이 출전해서 열에 여덟, 아홉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대패 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598년 제1차 고수 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2차 전쟁(612)과 살수대첩

612년 수나라 2대 황제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 첫 번째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수륙양로를 통해 쳐들어왔다. 먼저 육군은 탁군(涿郡)에 집결, 좌우 각각 12군으로 편성해 고구려를 향해 진군했다. 동원된 병력은 모두 1133800, 군량운반자의 수는 정규군의 배가 되었으며,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만 40일이 소요되었다. 세계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다.

육군을 지휘한 수양제는 요하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뒤 요하전선의 몇몇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고구려 핵심 방어성인 요동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엄청난 군대와 당거(바퀴 달린 공성무기)충거(성벽을 부수는 차)운제(높은 사닥다리) 등 신무기들을 동원했다. 이 상황에서 공포와 열세를 무릅쓰고 대승리를 거둔 탁월한 전략가인 성주의 이름은 기록돼 있지 않다. 훗날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서곽잡록등을 인용해 그가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라고 주장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수양제는 전략을 변경해 평양성 해륙협공작전을 지시했다. 육군은 별동대 30만 명으로 고구려의 주력방어선을 피해 요하전선을 우회한 뒤 남쪽으로 신속히 진군했다. 산동 해안을 출항한 수군 함대는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협공하고, 별동대에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수나라 수군 지휘자 래호아는 공명심에 불타 별동대의 평양성 접근을 기다리지 않은 채 수군 단독으로 직접 공격했다. 그러나 고건무(후에 영류왕)의 유인작전과 방어체제에 걸려 평양성 60리 밖에서 궤멸했다. 대기하던 을지문덕은 즉시 추격전을 펼쳤다. 보급망을 상실한 우중문과 우문술의 별동대는 서둘러 퇴각하다가 살수에서 전멸 당했다. 수나라는 요하를 건너 살아온 자가 겨우 2700여 명일 정도로 대패했다(자치통감).

 

살수는 청천강 아니다

북한 평양방송은 지난 20041121일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612년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의 살수’(薩水)는 중국 요동반도 대양하(大洋河)의 큰 지류인 초자하(哨子河)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연합뉴스에 보도된 당시 방송내용이다.

수나라군은 압록수 즉 중국의 태자하(太子河비류수)를 건너 침공해 왔다.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에 의해 살수 서쪽까지 이끌려온 수나라 군사들은 장마철에 물이 불어난 살수, 즉 오늘날 중국에 있는 대양하의 큰 지류인 초자하 기슭에서 몰살되었다.

지난 시기 살수대첩을 청천강에서 있었던 대승리로 간주해 왔다. 이것은 삼국사기저자 김부식이 우리 측 기록은 버리고 자치통감》ㆍ《수서등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살수가 청천강이 될 수 없는 근거로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비롯한 요하 동쪽의 기본 전선에서 완강한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고 기본전선의 한 모퉁이도 돌파하지 않았던 정황에서 고구려 후방 깊이 천수백 리나 되는 수도 평양성까지 30여만의 군대를 별동대로 들이민다는 것은 군사학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요동성에 자리 잡고 있던 수양제가 724일의 패전 소식을 들은 지 하루만인 725일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청천강일 경우 그 거리가 1천리가 넘어 도저히 불가능하다.

말을 타고 달려도 하루 동안에 왕복 2000여 리를 도저히 달릴 수 없다. 수양제가 그 다음 날로 보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압록수를 건넌 적군이 200여리 더 가서 725일 안으로 당도할 수 있는 거리에 그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결국 요동성과 살수 사이의 거리는 몇 백 리 안팎이었으며 따라서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중국의 초자하이다.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 압록강 이북을 통치하기 위해 단둥(丹東) 위에 있는 봉황성에 북평양을 설치했는데 수나라가 쳐들어온 것은 바로 북평양이다.

 

3(613)4(614) 전쟁

수양제의 폭정을 반대하는 투쟁과 폭동이 전국 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산동지방에서는 왕박유패도두건덕 등이 폭동을 일으켜,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노래인 <무향요동랑사가>를 퍼뜨리며 투쟁을 벌였고, 북방에서도 수십만 명의 폭동군이 군현을 들이쳤다.

그럼에도 수양제는 613년 다시 수십만 명의 병력을 긁어모아 요동으로 내보냈다. 요하를 건넌 적군은 신성과 요동성을 겹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모두 20여 일이 지나도록 끄떡 없었다.

이때 613년 전쟁 때 군량운반 담당책임자였던 양현감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624일에는 양현감과 친밀한 교우관계를 갖고 있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 백애성(백암성)으로 망명했다. 수양제는 628일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수양제는 614년 또 다시 침공을 명령했지만 도망가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였고, 식량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궁지에 빠져 있던 수양제는 곡사정의 송환으로 퇴각할 구실이 생겨나자 84일 퇴각했다.

4차례에 걸친 고구려에 대한 침공 실패는 수나라 내부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으며 각지에서 수많은 농민폭동이 발발했다. 민중들의 반발과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양제는 피살되고 수나라는 619년 멸망하고 만다.

 

을지문덕은 누구인가

김부식은 삼국사기열전에서 고구려가 대국 수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극찬했다. 그렇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을지문덕 전기는 중국 사서(史書) 기록을 재편집한 것에 불과하며, 내용도 612년 수나라 군대를 격퇴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의 조상출생지성장 과정 등에 알 수 없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해동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돼 있지만 근거는 부족하다.

중국 쪽 역사서 자치통감에 인용된 혁명기(革命記)라는 책에는 을지문덕의 이름이 울지문덕으로 나온다. 북쪽 유목민인 선비족에는 울지라는 성이 있어 중국 왕조에도 관료로 많이 진출했다. 을지문덕과 비슷한 시기에 울지경덕이란 인물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을지문덕을 선비족 계통의 귀화인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는 부여족을 중심으로 말갈거란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을지문덕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을지라는 성이 고구려 관위명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가부장을 뜻한다는 해석과 만이 성이고 는 존대의 접미사라는 견해도 있다.

 

살수대첩 이후 사라진 을지문덕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해상잡록이라는 역사서를 근거로 을지문덕과 고건무(훗날 영류왕)의 논쟁을 설명하고 있다.

3차 전쟁 때인 614년 수나라 군대는 침공을 감행해놓고도 섣불리 진격하지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강화 협상 문제가 급부상했다. 을지문덕파는 여세를 몰아 수나라를 공격하자고 촉구했다. ‘장수왕 이래의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구려 보수세력은 수나라를 대파해놓고도 수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다. ‘이제까지 너무 강경했기 때문에 수년간의 전쟁을 초래했으니, 앞으로 수나라와 화친하고, 백제신라를 더 압박할 것을 주장했다. 논쟁 당시 영양왕은 을지문덕의 주장에 공감을 표했지만, 귀족 세력이 고건무파를 지지했기 때문에 결국 고건무의 손을 들어줬다. 을지문덕은 이 논쟁을 계기로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채호가 쓴 을지문덕전이때 을지문덕이 파직을 당했는지, 아니면 참소를 만났는지, 늙어서 죽었는지 도무지 상고할 길이 없다고 아쉬워한다.

을지문덕 - 1908년 대한제국 역사교과서 '초등 대한역사' 수록 삽화
을지문덕 - 1908년 대한제국 역사교과서 '초등 대한역사' 수록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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