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농부(15) 처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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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농부(15) 처서비
  • 차은숙 글짓는농부
  • 승인 2021.08.2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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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그친다는 ‘처서’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지만 한낮의 가을볕이 참 좋은 계절이다. 이 가을볕이 너무 좋아 어떤 시인은 ‘가만히 나를 말린다’고 했는데 옛적에도 처서의 세시풍속은 포쇄(曝曬)라고 해서 뭔가를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책에 바람을 쐬는 거풍을 하고, 땡볕이나 그늘에 두어 여름에 눅눅해진 책장을 고슬고슬하게 말렸다. 이런 책을 다시 읽으면 갓 지은 밥을 먹는 것처럼 책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바깥양반들이 책을 말리는 사이 여인들은 장롱에서 옷을 꺼내고 이불을 가져와 널었다.

이런 풍습이 생긴 것은 선선한 가을바람과 따사로운 햇살로 못 말릴 게 없을 것 같은 이 무렵 날씨가 포쇄하기에 딱 좋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비가 내리면 걱정이 많다. 한참 익어가는 곡식에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이다.

처서에 비가 내리는 비를 ‘처서비’라 하는데 옛날부터 이를 몹시 꺼려했다. 처서비가 내리면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고 했단다. 따듯한 햇살이 한참 필요할 때인 나락이 빗물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니 그렇다.

당장 한참 따고 말리기 바쁜 고추 농사며, 우리 농장의 토마토도 그렇다. 토마토는 지난 7월 말에 아주심기를 했는데 어린 모종이 한낮의 불볕더위에 뿌리 내리고, 잎을 키우느라 힘에 겨워했다. 그래서 한낮에는 차광 커튼을 내려 그늘을 만들었다. 그러다보면 웃자람이 문제다. 적정한 햇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토마토가 웃자라면 키만 컸지, 잎도 작고 줄기는 여리여리하다. 이대로 자라면 가늘고 긴 줄기와 작은 잎은 튼실한 열매를 기르지 못하게 된다. 거기다 병충해에도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팔월 중순이 넘어서면 하루하루 짱짱한 햇빛 속에서 잎을 키우고 줄기가 굵어져야 한다. 요즘이 그런 때다.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지만 처서 무렵의 하루 볕도 그에 못지않아서, 곁순이 하루 사이에도 쑥쑥 자라는 때다. 

토마토 곁순은 줄기와 원가지 잎 사이에 나는데 잎 하나에 곁순 하나다. 부지런을 떨어 새끼손톱만큼 자랐을 때 서둘러 따주기를 하면 그 자리에서 또 돋아난다. 어쩌면 이리도 꼬박꼬박 곁순을 돋우고, 열심히 키울까 싶기도 하다. 생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무한형 토마토의 본성인 모양이다. 농부는 이 곁순을 자르고 본줄기 하나를 튼실하게 키우는 게 일이라서 보는대로 곁순을 따낸다. 

토마토가 자라고 곁순이 올라오면 하루가 다르게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는데 온실 속 생태계도 복잡해진다. 벌레들도 어떻게 알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주심기를 끝내자마자 끈끈이 트랩을 두둑마다 수십 개 씩 걸어 두는데 노란색에 유인되어 달려드는 벌레들이 제법 많다.

땅 속에서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익균과 유해균이 서로 우점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콩알보다 작은 열매를 내보내며 무럭무럭 커 갈 테고, 비오고 개는 날들이 오갈 것이다. 농부는 이런 날에는 이런 걱정 저런 날에는 저런 걱정을 하겠지만 그 걱정을 껴안으며 몸을 움직이고 마음으로 살피면서 농사를 짓는다. 

‘짓다’라는 동사는 밥을, 옷을, 집을 짓게 하고 글을 짓고 노래를 짓는다고 할 때 쓴다. 그 어떤 것의 이름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서 눈물도 짓고, 웃음도 짓는다.

이제 더위도 한풀 꺾여서 너무 뜨겁지 않은 적정한 온도로 제대로 햇볕을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비가 온다. 농사를 짓다보니, 이래도 날씨 걱정 저래도 날씨 걱정이 많다. 속담에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할 수 있고, 장인 구레나룻 밑에서도 피한다고 하니 적게 내린다는 말인데 그렇게 쉬이 그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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