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잔치를 끝냈다
채광석 시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
한 시인이 80년대 종언을 선언하던 무렵
무섭다 좀 와줄 수 있겠니, 전화 한 통이
한밤중 조난신고처럼 불쑥 찾아왔다
명륜당 마지막 은행잎이 지던 육 년 전
겨울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던 한 여자
전철도 버스도 다 끊어진 겨울밤
새벽 택시는 옷 단추를 뜯으며 달렸다
외등 하나 걸린 좁다란 짐 골목길에
그 여자는 빈 소주병처럼 서 있었다
연락할 곳이 없었다.
연락할 사람도.
얇은 가을 담요 한 장 달랑 깔아놓은
그 여자의 겨울 방에 들어섰을 때
어이가 없어 헛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나왔다
그 여자는 시한 종료되었던 위장 취업자
없어진 지 오래인
조직이란 이름의 유령만 저 홀로 붙들고
제 청춘의 푸른 피가 다 빠져나간 줄도 모른 채
새까맣게 야위어갔던 것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할 만큼 했다 당신은.
그제야 서른에 들어선 그 여자가
곰처럼 큰 울음을 터뜨렸다
채광석 시인. 1968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인 23세 때 등단했다. 하지만 등단은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등과는 화려함의 결이 전혀 다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에 절필을 한 후, 나이 쉰이 넘은 지난 2019년 2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펴냈다. <오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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