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30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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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30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3.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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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30회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인득이 옛 주인 명진을 찾았다.

그래 사량리 사람들 인심은 어떠한고? 가족들은 잘 지내는가?”

인득이 이사를 한 후 향리들과 교제하고, 명절 때 사당패를 불러 동네잔치를 하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 일들을 신이 나 말하다가 곧 맥이 빠진 모습을 보였다.

잘했네. 아암 그래야지. 근디무신 걱정이 있나? 표정이 왜 그리 어두운고?”

. 어르신, 지가요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어서 염치 불구하고 찾아 왔습니다요. 아시다시피 저희들을 면천해주신 덕으로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습니다만.”

이어서 일전에 훈장과 대화한 것을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겄구만. 노비출신인 것이 드러나면 재산이 많은들어찌 체면을 세우며 편히 살 수 있겄나? 그간 그 박씨나 손씨에게 자네를 한양에서 내려 온 양반이라고 소문을 냈다고는 허지만. 그래, 어찌할 생각인고? 말하는 걸 보니 무신 방도가 있는가비여?”

그 둘은 문제가 없는디, 그 훈장이나 다른 양반들이 좀 걸린다니까요. 여러 가지 고심 끝에 지가, 말이 될지 모르것지만, 저의 집을 어르신 족보에다 끼워 넣으면 어쩔까 허는 생각을 혀 봤는디요. 어짜겠.”

? 족보에? 이거 참 난처하게 시리. 나라에 법도가 있고 양반들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는디, 내가 멋대로 아무나 양반을 만들었다간 큰일 날 일이제. 어허, 그거 참.”

그러긴 합죠만. 지가 한 방도를, 그러니께, 족보 보첩 한 질을 저에게 며칠만 빌려 주시면.”

빌려줘? 그래 갖고 어쩔 셈인디?”

저 윗대 할아버지 중 한 분의 막내아들로 넣어 보첩을 따로 만들면 어쩌겄나 싶긴 헌디.”

예끼 이 사람아! 누구 죽일 소리를 하고 있구먼. 그러다가 사람덜이 알아 불면 자네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도 먹칠 당허고 망신을 받게 될 일이야! 허 참. 근디 누구한테 그걸 맡기려고 했는가?”

어르신, 지송해요. 고정하십시오. 긍께 인근 동네에서 글 좀 아는 양반 하나를 찾아 맡기려고 했지라우. 논 몇 마지기면 입을 막을.”

허어! 이 사람 보게. 정말 큰일 낼 사람이구만. 그 자가 그래 자네 뜻대로 끝까지 입을 꼭 다물고 있을 것 가텨? 낭중에 입막음 값이 더 들어 가네. 이 사람아!”

그럼, 어짜면 좋겠습니까요? 지는 그렇다 치고 나중에 제 자식 놈들이 노비 집안이라고 알게 되면 얼마나 낙심할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요.”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참동안 말이 없이 이리저리 궁리하던 명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자네의 딱한 모습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는구마이. 으음, 하여튼 내가 방도를 한번 생각해 볼 거시니 한 달 후에 다시 오게.”

 

한 달이 지나고 인득이 순창에 갔을 때, 명진이 한 권의 보첩을 내 놓았다.

이 보첩을 보게. 자네 말마따나 필사본을 만들어 봤네. 자네 조상을 우리 중시조 13세손 충청관찰사 그분의 아들인 숙겸의 3남으로 해놨어. 이 이후는 항렬을 넣어 적당히 이름을 지었제. 그러니께 우리는 중시조 그 분의 손자(15세손) 때부터 갈라진 일가인 셈인 게지.”

! 거 참.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요.”

그러나 말이여. 조심해야 헐 것이 있네. 내가 일부러 오래된 종이를 찾아내어 쓰긴 했지만, 이 보첩에 먼지를 뒤집어씌우고 구깃대어 오래된 책인 것처럼 만들어 놓아야 해. 그리고 적당한 기회에 그 훈장에게 슬쩍 보여 주기만 하게. 절대 가져가게 해서는 안 되네 이. 여기 마지막 장에 우리 조상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슨 벼슬을 했는가도 쓰여 있다네. 자네도 글을 좀 아니까 한 번 읽어보게.”

어르신. 근디 이걸 누가? 혹시 친히 쓰신 겁니까요?”

아니야. 내가 뭐 이리 잘 쓰는 재주가 어디 있등가? 아들 인권(기준의 고조)이가 내 말에 맞춰 쓴 것이네. 어찌 다른 사람한테 맡기겠나? 이 중요헌 일을. 다만, 보첩을 새로 만든 것에 대해서 자네 자손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야. 자네 때까지만 기록이 되어 있으니께 후대 자손들에 대해서는 붙여 나가면 될 것이야.

다음으로 말이여. 본가와 묘소는, 이미 고양에 있다 했잖은가. 이삼년마다 음력 상달 보름이 되면 묘사 지내러 간다하며 한양에도 다녀오도록 허게. 묘도 찾아가 보게. 아들 부현이도 데리고 가 한양 구경도 시키고 이, 올 때 훈장한테 한양 선물도 사 갖고 내려와. 그려야 입단속은 되지 않겠나.“

예 예, 그리해야겠네요. 고양 중시조 묘를 지키는 일가 주소를 주셔요.”

그리고 손씨 그 사람, 내 지켜보니 능력도 있고 사람이 참 괜찮더구나. 그 자를 통해 관아와 늘 연()을 유지해 나가도록 해. 친하게 지내면서 양반의 도리와 언행을 배우도록 해. 그리고 <명심보감><사자소학>을 다시 읽고, 언행도그리 행하도록 하게.”

인득이 양반은 아무리 급해도 뛰어가지 않고 천천히 걷고, 말도 느리게 해야 하고, 굶어도 돈 버는 천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서요. 물마시고 이 쑤시는 허세도 부리잖아요.’라며 웃자 명진이 벽장에서 책 한권을 펴 놓고 집에 불이 나고, 아이가 물에 빠지는데 빨리 달려가지 않으면 어찌 되겠나?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누가 쌀과 보리를 준다던가?’라고 반문하며 여러 사례(事例)를 들어가며 양반의 처신과 도리 즉, 평민과 천민에게도 예의를 갖춰 대하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불쌍히 여겨 인덕을 베풀며 인심을 얻어 나가야 하고,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다해야 하며, 염치를 알고 상스런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인득은 사례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봐 온 명진의 모든 언행이 이와 딱 맞는 진정한 양반의 모습인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공경하는 마음이 일면서 반드시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인득이 진지하게 되물어 가며 언문과 한문으로 적어나갔다. 어느 덧 자정을 넘어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튼 겉보다 속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참 양반이 되어야 하는 거여.”

. 잘 명심하겠습니다요. 이토록 주도면밀하시다니. 너무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요. 어찌 다 이 은혜를 다 갚겠습니까요?”

은혜? 은혜랄 게 뭐 있나. 우리가 일가가 되라고 전생에서 맺어준 것이라고 생각 허세나. 허허!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거, 자식들 배필을 정할 때에 말이여, 이왕이면 괜찮은 집안과 혼인을 성사시켜 나가게나.”

인득이 돌아갈 때에 명진이 <홍길동전><전우치전>을 건네주었다.

 

인득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와 장모와 아내, 아들을 모이게 하였다. 보첩을 보여주며 그간의 일을 모두 알려 준 후, 정명진에게 배운 양반의 도리와 처신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장모 윤씨가 간곡히 당부하였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꼬.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다 갚아야 헐 것이네.”

인득이 며칠 후 아들 부현을 따로 불러 보첩을 펼쳐 외우게 하며, 적어 온 것을 보면서 양반이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치고 당부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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