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24) 복흥면 석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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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24) 복흥면 석보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3.2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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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짐대의 고장

석보리(石洑里)는 복흥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답동리에서 쌍치면 도고리 신평으로 넘어가는 치재 아래 추령천 가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상치등면 독보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행동(杏洞)을 병합하고 복흥면에 편입됐다. 마을 뒤편으로 국도 29호선이 쌍치면을 경유해 정읍 쪽을 향해 지나간다. 202137일 기준 인구는 42가구, 78(남자 38, 여자 40)이다.

마을 유래

석보리는 산간지역 강변 마을로, 야트막한 구릉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 주변에 돌산이 많고 마을 앞 큰 냇가 추령천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어야 하므로 돌을 쌓아 보()를 만들어 농업용수를 썼다. 그래서 돌로 보를 쌓았다 하여 독보라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보(石洑)라 기록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전라남도 담양 등지에서 김제전주로 가는 식량 수송로로, 또 서해안 소금 수송로로서 가장 가까운 길이었기에 숙박지로 식사하면서 쉬어 가는 주막들이 있어 번창하던 마을이었다. 현재 주민들의 주된 소득원은 벼농사며, 다수 농가에서 복분자오디완두콩오미자 등의 특용작물을 재배한다.

복흥 석보리 전경
복흥 석보리 전경

석보리 장승제와 짐대제

석보리는 군내에서 장승제를 지내는 유일한 마을이다. 석보리 장승짐대제 또는 당산제라고도 하는데, 격년으로 음력 21일 마을 앞에 짐대와 장승을 세우고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다.

짐대란 한국인이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세운 긴 장대(長竿장간)를 일컫는다. 짐대는 터를 눌러 주는 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터를 눌러 준다는 것은 곧 진압(鎭壓)을 의미한다. 풍수지리적으로 화기가 있는 산이 마을에 비치면 화재 발생 빈도가 높다고 생각해 화재 방지용으로 짐대를 세운다. 짐대에 장식하는 오리가 물오리()이기 때문에 물의 기운으로 화마(火魔)를 대응한다는 것이다. 석보리에서는 화기가 머문다는 세 곳의 산을 향해 오리 짐대를 세웠다. 남쪽 짐대는 추월산을 향하고, 서쪽 짐대는 백방산을 향하고, 북쪽 짐대는 부엉바위를 향한다. 강둑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입구 왼쪽에 1기가 세워져 있고, 마을 오른쪽 강변에 1, 마을 뒤쪽에 1기가 세워져 있다.

석보리 목장승은 군내에 있는 유일한 목장승이다. 추령장승촌 목장승이 한 개인의 창작 조형품인데 비해 석보리 목장승은 마을 주민들이 마을 입지와 관련해 액막이용으로 세운 역사가 깊은 정통 목장승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장승은 각 방위에 따라 동방축귀대장군’, ‘서방축귀대장군’, ‘북방축귀대장군이라는 명문을 적어 넣어 잡귀 방지용으로 세워 놓았다. 이 같은 명문은 석보마을 장승이 액막이 장승이며, 천연두 등 전염병이 횡행하던 시기부터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 천연두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할 목적에서 축귀용 대장군상을 세워 놓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석보 마을 목장승은 액막이 기능의 두창장승이라 할 수 있다.

석보리 장승과 짐대는 격년제로 2월 초하룻날 세워진다. 장승과 짐대는 모두 소나무를 재질로 하고 있다. 짐대와 장승 세우기는 각각 세 뜸별로 세워진다. 세 뜸이란 마을에서 짐대와 장승이 위치한 곳의 주변을 세 구역으로 나누고, 그 구역 사람들이 자기 구역의 장승짐대 세우기를 책임진다. 해뜨기 전에 세우면 좋다고 하여 이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구역별 주민들이 산으로 올라가 짐대와 장승으로 사용할 나무를 베어 온다. 나무를 베어 오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나무껍질을 벗겨 장승을 만들고 짐대의 오리를 조형해 짐대와 장승을 세운다. 짐대장승 세우기가 완료되면 마을 풍물패가 3곳을 돌면서 굿을 쳐 주는 것으로 짐대장승제를 마친다. 그 뒤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을 들면서 마을 잔치를 벌인다. 장승짐대제는 과거보다는 몹시 약화되어 제관도 따로 없이 짐대장승 앞에서 이장 주관으로 누구나 나와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것으로 끝맺는다.

석보리는 짐대와 장승을 한 세트로 3곳에 세우고 있다. 이런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사례다.

석보리 짐대와 장승

부엉바위산

석보리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부엉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불러온 이름이다. 산 밑으로 부엉바위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훈몽재낙덕정김병로 생가로 이어지고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부엉바위산
부엉바위산

군수 이성렬 영세불망비(郡守李聖烈永世不忘碑)

이성렬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순창군수로서 농민군과 협상적 태도를 취하며 순창지역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쓴 인물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 군현 단위 집강소 운영 실태는 농민군의 통치권 장악 정도에 따라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농민군이 막강한 세력을 바탕으로 집강소를 장악하고 치안기능을 넘어 사실상 통치권을 행사한 지역이다. 둘째, 농민군 세력이 우세하지만 지배 권력과 협조관계에 있던 지역이다. 셋째, 농민군의 세력기반이 약해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했으나, 반농민군들에 의한 농민군 탄압이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 가운데 두 번째 특징을 지닌 대표적 지역이 순창이었다.

이성렬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오가작통제와 향약을 강화해 농민군을 방어할 계획을 세우고 경내를 단속했다. 그러다가 6월부터 농민군 집강소의 설치를 수용했다. 이러한 결과 집강소 시기에도 순창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안정적인 국면을 유지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도 적었다. 순창이 혁명군의 봉기에서 비롯된 전쟁 상황에서도 비교적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연유는 그가 추구한 위민(爲民)에 있었다. 그는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순창군수를 지내면서 전통적인 지방관의 이상적인 행정을 수행하고자 했다.

보통 공적비 대부분이 지방관과 지역 유지의 이해관계에 의해 세워지곤 한다지만, 1894년 순창군수직을 떠난 후 6년 뒤인 1900(광무 4) 4월에야 영세불망비가 세워진 것은 순창을 지킨 그의 업적을 기리는 군민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군수 이성렬 영세불망비(郡守李聖烈永世不忘碑)는 석보리 마을회관 앞에 군수 신대균 공적비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

군수 이성렬 영세불망비
군수 이성렬 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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