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22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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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22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1.1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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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22

 

지가 그런 생각을 안 해봤거씨요? 그 왈패소동 때 우리 식구들을 구해준 후, 사실은 그 사람을 남다르게 보고 있었지요. 근디 아부지가 갑재기 서두르고 멍상 모른 지가 기냥 시집을 갔다가 인자는 이리 불운헌 생과부가 되어. , 지가 좀 미쳤나 봐요. 그 사람이 안채로 오는 날이면 보고 싶어 저도 모르게 가까이 가게 되야요. 종 집안이라지만 얼마나 듬직하고 좋은지, 등만 봐도 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어머, 어머! 이거. 큰일이네이. 상사병 초기를 넘었구마이. 양쪽 다 흠이 좀 있긴 헌디, 아이고. 이거 어찌야 쓰까이!”

한편, 형만의 일을 도와주려고 안채를 들락거리다가 숙영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진 인득은 밥상을 받고 낼 때마다 간절히 그윽이 쳐다보는 숙영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숙영을 업고 돌아올 때 불두덩이에 열이 뻗치고 온몸이 흠뻑 땀이 젖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며 얼굴을 붉혔다. 인득은 그때마다 잠을 설치고 아버지의 꾸중을 듣곤 했다.

어느 날, 형만과 저녁을 먹고 장부를 정리한 후 늦게 돌아갈 때에 대문 옆 담벼락 감나무 밑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숙영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남녀는 부둥켜안았다. 숙영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인득의 온 몸이 불덩이가 되었다. 순간 인득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안 된다. 주인 애기 씨는 넘보지 마라. 까닥 잘못 했다가는.’ 인득은 자신을 누르고 조용히 그녀를 밀어내었다. 그 후에도 뒤뜰 은행나무 밑에서 또 만났지만 그때마다 인득은 숨을 고르며 숙영을 달래어 보냈다.

한편, 김상길은 또 다른 사윗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애기를 못 가져 소박을 맞았다는 소문이 돌아 선뜻 나서는 중매쟁이가 없었다. 형만은 숙영과 인득이 서로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 최씨로부터 듣고 알게 되었다. 형만은 인득이 종 집안이지만 괜찮은 젊은이로 소박맞아 불운하게 된 누이의 배필이 되는 것도 괜찮겠고, 또 나중에 돈을 들여 면천하게 되면 그 이상 더 좋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버지의 눈치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그들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아니 그들이 아니고 그들의 주인 김상길 집안에 정말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닥친 것이었다.

주인은 설이 되기 전에 법성포에서 굴비를 도매로 받아 서해 뱃길로 한양으로 올리곤 했는데, 이때 아들의 경험을 넓힐 요량으로 형만을 책임자로 정해 배를 타게 하였다. 이때 인득이 같이 가야 했으나 하필 합천과 대구에 중요한 물건을 갖고 올라가야 하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같이 보내지 못하고 다른 수하들을 동행시켰다.

그런데 불행히도 군산 앞 선유도 서쪽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 그만 암초에 부딪쳐 배가 뒤집혀 수하 두 명만 겨우 살아 돌아왔다. 인득을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던 형만이 그만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주인은 그때 수하들을 크게 타박하면서 인득이가 같이 갔더라면 어떻게든 아들이 살아 올 수 있었을 것이라며 대성통곡하였다.

불행이 겹쳐 온다더니설상가상으로 김상길의 세 살배기 손자마저도 홍역을 앓더니 얼마 후 결국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상길 내외는 슬픈 나머지 방에 드러눕고,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최씨가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가고, 밤이 되면 최씨가 흐느껴 울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어미가 간곡히 위로하고 달래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최씨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숙영이 이상한 낌새를 갖고 올케 방문을 열다 자지러지게 놀라 자빠졌다. 최씨가 목을 매달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최씨가 저 세상으로 갈 뻔하였다. 숙영이 아예 올케 방에서 같이 지내며 많은 얘기를 나누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최씨는 밥을 먹고 나면 자주 토하고 몸은 더 야위어 갈 뿐이었다. 김상길이 의원을 불러 병의 원인을 찾아 나섰지만 의원도 처방을 못 내리고 있었다. 의원이 돌아갈 때에, 숙영이 배웅하면서 쪽지 하나를 건네었다. 이튿날 아침 의원이 한약재를 싸들고 다시 찾아왔다.

주인장. 내 어제 돌아가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는디요, 아무래도 심병(心病) 그게 깊어진 것 같구먼요. 어짰거나 옆에서 누군가가 성심을 다해 간호허고 챙겨줘야 낫는 병입죠. 편안하게 해주셔야 허는디.”

아니? 우리가 이처럼 잘 해주고 있는디, 얼매나 더, 우리 숙영이가 매일 저녁 같이 자며 챙겨주고 있지 않소?”

아무리 그려도 그렇지가 않은 것이라우. 어차피 여긴 시댁이지 않소이까?”

시댁이라? 그러면, 지그 친정으로?“

, 맞아요. 정말 미너리를 살릴 생각이시라면, 델구 있어 봤자 애가심이지라우. 그냥 친정으로 보내 부는 것이 지일 상책이외다. 흐엄.”

그게그쪽이 명색이 양반 집안이라 시댁귀신이 되라.’고 누누이 당부했을 것인디, 받아들이겠소이까? 지금도 수절한다며 죽겄다고 저 난리인디.”

그럴수록이 보내 부러야 혀요. 모르긴 몰라도 자기 딸이 시집가서 죽었다 하면 원망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소이까? 또 이러다 여기서 죽어 나가면주인장 체면이 머가 되겠소? 맘 편히 나다닐 수 있겠소이까? 팔자를 바꿔주셔야.”

숙영이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부지. 지가 봐도 여그보다는 친정이 더 편할 거 같은디요이. 지도 아부지가 이곳으로 데려왔잖아유.”

김상길은 사나흘 고심 끝에 우선 사돈집에 기별을 넣었다. 윤씨는 숙영과 같이 며느리 방으로 들어가 쌀쌀맞고 매정스레 내뱉었다.

여그서 머 송장 치울 일 있냐? 내일 당장 친정으로 돌아 가그라! 딸린 새끼도 업쓴께 돌아 올 생각일랑 다 접어 불고. 당장 짐을 싸!”

안 되야요! 안 갈래요. 여그 귀신이 되야제 친정 어딜 가요? 어무님!”

윤씨가 귀를 막고 바로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숙영이 의원과 아버지 간에 나눈 대화를 말해주며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날 밤, 숙영이가 옆에 누울 때 최씨가 숙영의 어깨를 다독이며 인득과는 어찌 되어 가는지를 넌지시 물었다. 숙영이 그간 몰래 만났으나 인득이 상길 부부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된다고 했다며 울먹였다.

아가씨. 그 사람 종 출신이긴 허지만 인자 듣고 보니 허는 행동거지가 예사스럽지 않고 참 진득허요. 된 사람인 것 같으니 꽉 잡아야것소. 어뗘요? 자신 있시요?”

그럼요. 저 그 사람 아니면 절대 시집 안 가요. 정 다른 디 가라면 저, 목 매 달고 말 거구만요!”

 

김상길이 행랑아범에게 가마를 준비하고 가마꾼 네 명을 붙이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최씨가 안방으로 들어와 하직인사를 올렸다. 김상길이 전대를 꺼내며 말했다.

이건 니 것이다. 논 닷 마지기는 살 수 있을 것이다. 잘 챙겨 먹고 여그는 잊고 살아라이. 친정 애비 말씸대로 하렴.”

증말 죄송혀유. 아부님 어무님. 지가 불효만 허고 갑니다요. 이리 많은 재산꺼정 주시고.”

최씨가 뭔가 머뭇거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아버님. 어머님. 지가 헐 말이 하나 있는디요.“

윤씨가 문을 열고 문 앞에 서 있던 하인들을 문 바깥쪽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무슨 말이냐? 걱정 말고 인자 말해 보거라이. 머 필요한 거 있으면.”

아부님, 어무님, 지 얘기 듣고 놀라지 마셔요. 회도 내시면 안 되야요. 사실은, 아가씨가 행랑채 인득이를 연모하고 있어요. 인득이도 그래요. 오래 되었어라우. 아버님이 크게 나무라실까봐 애기 씨가 감히 말을 못 꺼내고 쉬쉬하고 있었대니까요.”

김상길이 놀라 뒷목을 잡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윤씨를 바라보다가 숙영을 노려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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