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20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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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20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1.0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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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20

 

, 인권(기준의 고조), 인 자 돌림이죠. 억새보다는 위입죠.”

어질 인에다오늘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얻을 득()을 붙여서 인득으로 허면 되겠군. 정인득, 좋네, 좋아! 앞으로 다른 객줏집이나 상단과 거래 할 때에 이 이름을 쓰게. 알겠소? 형만아, 너도 이 사람들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라.”

성과 이름! 그들에게는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어찌 종 주제에 양반의 성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밤 두 부자는 감격에 겨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처럼 주인과 아들 형만이 상진 부자를 믿고 배려하니 인득은 점차 객줏집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 사정을 더 소상히 알게 되고 장사경험도 많이 쌓이게 되었다. 언문도 다 익히고 장부를 볼 줄 아는 인득을 주인 부자가 칭찬하고 챙겨주니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평소 경쟁자로 들쑥 부자를 마뜩찮게 또 쌀쌀히 대해온 행랑아범 식구들도 인득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우하였다. 주인은 열쇠꾸러미를 아예 인득에게 맡겼다.

 

들쑥 즉, 정상진은 언젠가 나이가 많아 늙어지면 이곳 목포를 떠나 고향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면천하기 전에는 들쑥이란 이름을 써야 하고 또 면천하더라도 고향에서 살게 되면 과거에 노비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향 순창과는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또 고향 사람들과의 왕래가 많지 않을 다른 군()을 염두에 두고 정착지를 고르고 있었다. 그래서 상진은 아들 인득에게 합천과 대구를 오르내리는 길에 살만한 곳을 찾아보라고 일러두었다. 인득이 마침내 남원 대촌면 섬진강 동쪽 강변에 있는 사랭이 마을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순창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또 남쪽으로 한참 내려간 아래쪽에 있어 적성 사람들과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인득은 대구로 올라가는 중에 늦은 오후 먼저 풍산면 자라뫼 마을 주막에 숙소를 정하였다. 바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사랭이 마을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가 동네 주막에서 주모와 또 술자리를 하던 몇몇과 얘기를 나누던 중 과거에 양반 집안이었으나 이제는 가난한 잔반이 되어 버렸다는 박씨가 눈에 들어왔다. 따로 얘기를 좀 나눠보니 붙임성도 좀 있고 행동거지나 말하는 품새가 믿음직하였다. 인득보다 세 살이 어렸다. 인득은 자기를 초계 정씨로 한양 북쪽 고양에서 살아 왔다며 친척이 있는 금과에 잠시 와 지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합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박씨를 또 만나고자주 만나다 보니 형 동생하며 지내는 임의로운 사이가 되었다. 인득은 박씨가 자기의 옛 조상들이 양반이었다는 얘기를 할 때 좀 관심을 많이 갖고 들어주면서, 주인 명진한테 들어온 풍월로 넌지시 말하였다.

우리 초계 정가 집안이 예전엔 벼슬살이를 좀 혔는디, 근래 외척세도가 심허니께 이젠 그나마 있던 줄도 끊겨지고, 하여튼 한양에 살기가 예전만 못헌 것 같여.”

그러시면 성님, 보시다시피 여그가 얼매나 좋소.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동네 인심도 좋고이. 아예 일로 와 사는 것도 괜찮지라우.”

동상 말이 일리가 있구먼. 한양 집 팔아서, 허허. 자네가 좀 도와 주면야.”

이튿날 아침, 인득은 마을 앞 강변 낮은 곳의 습지를 바라보고 거닐다가 고향 적성강(섬진강 상류)과 매우 비슷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저게 다 논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어서 물을 빼내고 개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목포로 돌아 온 인득은 여러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와 상의를 한 얼마 후 다시 박씨의 집을 찾아가 논 닷 마지기를 사 그에게 소작을 주었다. 소작료를 낸다 했으나 인득이 가끔 오갈 때 잠이나 자게 해주시게.’라고 말하며 그냥 넘어 갔다.

나중에 인득은 객주로 돌아오는 길에 영산강 중류지역의 한 마을 앞 제방을 보고 축방기술자를 수소문하여 만났다. 한 여름, 인득이 따로 말미를 내어 그 축방기술자 두 사람을 데리고 사랭이를 찾아 강을 오르며 천렵(川獵)에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이 대답하였다.

축방을 쌓으면 논을 많이 만들 수는 있겄습디다. 참 좋은 생각이긴 헌디 그 땅을 살 돈이 있긴 하오? 게다가 쌓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시고, 물길을 잡을라면 강변을 따라 십 여리를 올라가야 허니께 그 땅도 있어야 되지라우.”

집으로 돌아온 인득은 아버지 상진에게 사랭이와 강변 습지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그들에게 당장 그런 땅을 살 큰돈이 없었으므로 공염불에 그치고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였지만, 장차 언젠가는 그런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몇 년 전 왈패소동이후, 형만이 나주 토박이 향반의 여식인 최씨와 혼인하였다. 상길의 아내 윤씨가 친정을 통해 알음알음 연줄로 중매를 서 맞은 며느리였다. 친정이 가난하긴 했지만 심성이 곧은 모친의 영향을 받아 예의범절과 효심이 좋아 김상길 내외는 흡족하여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다. 돌이 지난 손자를 보는 재미에 빠진 상길은 객줏집 일을 외아들 형만에게 맡기고 있었다.

한편, 숙영은 아버지 상길의 소원대로 집에서 가까운 영암 월출산 서쪽에 사는 한 양반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김상길이 무엇보다 집안을 따졌으므로 예전에 진사를 한 집안으로 재산도 좀 있다더라.’는 중매쟁이의 말에 더 따지지 않고 재산을 좀 딸려 보내며 혼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숙영은 혼례를 치르기 전에 올케 최씨로부터 남녀교합에 대해 얘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초야에 신랑이 신부의 옷고름을 풀어주고 같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시댁으로 가는 날 아침, 최씨가 초췌해진 숙영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아가씨, 신랑이 밤새 힘들게 했나벼? 신혼 때는 다 그래요. 호호.”

새언니, 그게.”

이때 어머니 윤씨가 문을 열고 가마꾼들이 오래 기다리고 있다며 재촉을 했다. 숙영은 그렇게 시집을 갔다. 신랑과는 올케가 말한 운우의 정이 뭔지도 모른 채 석 달이 지나고 있었다. 시어미는 며느리가 늘 힘이 없이 통 말을 하지 않고 밥도 시늉만 내며 먹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다. 달거리를 물었으나 숙영이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달싹이다 말았다. 시어미는 혹시나 하여 근처의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 아들과 며느리를 진맥하게 했다. 의원이 남편의 진맥을 보려하자 손을 뿌리치고 방을 나가 버렸다. 숙영을 진맥한 의원이 뭔가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태기가 없다.’라는 말만 하고 총총히 돌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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