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25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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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25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2.0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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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면천이 되었고 기왕에 우리 성 정()을 쓰기로 했으니 말이여 우리 조상의 내력은 알고 있어야 어디 가서 쌍놈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대충 알려줄 것이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밖에 어디 가서 누가 묻더라도 잘 대답해 넘어가게.”

명진이 족보를 펴 놓고 초계 정씨의 시조, 본과 파, 충청관찰사 벼슬을 한 중시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인득이 귀담아 들으며 미심쩍은 것은 다시 묻고 외웠다.

 

얼마 후, 스물여덟 살 늦은 나이에 정인득이 마침내 화촉을 밝히고 혼례를 올렸다. 먼 길을 마다 않고 말을 타고 친히 내려온 정명진을 김상길이 마치 자기 옛 주인을 만난 듯 극진하게 모시며 대우하였다. 정상진의 체면이 크게 섰다. 김상길은 병든 몸이었지만 일어나 신랑신부의 절을 받았다.

정상진은 이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평민이 된데다 부잣집 주인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는 것에 과분하다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기쁨과 더불어 만족하였다. 얼마 후, 상진은 주인 아니 사돈 김상길에게 부모님의 병환을 핑계로 작별인사를 고하였다. 아들 인득 부부를 남겨두고 순창고향으로 돌아 와 부모님과 자식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정명진은 인득의 제안대로 면천비용으로 마을 앞 강변의 황무지를 관아로부터 헐값에 사두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도 인득이 돈을 보내오면 그때마다 계속 그 옆의 황무지를 조금씩 사두면서, 관아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지내시라는 인득의 건의에 따라 관아를 가끔 찾아가 술 접대를 하고 이방과 호방에게 용돈도 쥐어 주었다.

 

세월이 흘렀다. 상진의 부모가 늙어 예순 후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상진은 둘째 아들 인근을 결혼시켜 농사를 짓게 하며 집안일을 맡기고 터울이 많은 딸을 키워가고 있었다. 열다섯 두락으로 늘어나 있어 식구들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게 되었다.

 

인득은 장인 김상길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수하들의 공과(功過)에 따라 품삯을 달리 지급하고, 형편이 어려운 수하에게는 아끼지 않고 몰래 더 쥐어주었다. 수하들이 모두 열성을 다하고 잘 따라주었다. 인득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한문으로 쓴 풍자소설 허생전을 동네 훈장에게 부탁하여 언문으로 해석하여 여러 번 들었다. ‘가난한 선비 허생이 부자 변 씨에게 만 냥을 빌어 안성에서 갖가지 과일을 몽땅 사둔다. 제사에 쓸 과일이 없으니 도성의 과일 가격이 오르게 되고 이를 내다 팔아 큰돈을 번다. 또 그 돈으로 망건의 주요 재료인 말총을 사들여 상투머리를 해야만 하는 선비들에게 값비싸게 팔아 큰돈을 벌었다.’는 다소 황당한 얘기였지만, 인득은 이를 실제로 응용하였다. 지역마다 물건의 시세를 잘 가늠하고 계절에 잘 맞춰 여러 가지 물품, 특히 토산특산품을 적시에 이리 저리 조달해 내어 한양으로 올려 보내어 더 많은 이문을 남게 하였다.

인득은 한양 객줏집들의 장부정리방법을 배우고 응용하여 수지상황을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특히 거래가 잦은 한양 마포에 있는 객줏집들과 원만하게 지내면서, 방짜유기나 가벼운 꽃잎자수 베개잇과 조그마한 바구니와 주머니, 값이 많이 나가는 부녀자들의 장신구 등 수공예품과 해우()와 건어물의 거래를 넓혀가게 되면서 이전보다 수익도 덩달아 늘어나 장인의 재산이 두세 배로 늘어났다.

인득은 장인 김상길에게 한양의 원() 주인에게 매년 관례적으로 내고 있는 상납금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사실 원 주인의 힘이 예전만 못해져 객주를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이제는 특별히 도움 받을 일도 없었으므로 김상길이 이를 옳게 여겼다. 그는 인득을 한양에 올려 보내 원 주인에게 적절히 타협하도록 전권을 주었다. 인득이 한양으로 올라가 원 주인에게 5년 치 상납금을 한꺼번에 주어 수십 년 동안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마무리 지었다. 그래도 인득은 설과 추석 명절과 원 주인의 생신이 돌아오면 영광굴비 두 궤짝을 보내 주고 있었다.

인득은 예전 왈패사건 후 왈패들 중 아직도 목포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모친에다 자식들이 셋이나 딸려 있는 가장으로 포구에서 날품팔이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그 자를 불러 이런 저런 심부름을 시켜 보았다. 두어 달 후 믿음이 가고 수완도 있어 보여 그에게 옛적 푸대접을 받고 쫓겨난 그 법성포의 객주를 탐문하게 하였다. ‘그 주인이 이미 늙어 잘 안 되는데다 빚까지 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인득이 그에게 임무를 주어 그 객줏집을 싸게 인수하게 하고 주로 굴비와 건어물을 취급하는 객주로 탈바꿈시켜 운영까지 맡겼다.

인득은 그 외에도 금산에도 홍삼 만드는 곳을 인수하여 금산 토박이로 나이는 있지만 신실하고 기술도 있는 장인(匠人) 봉씨에게 맡겼다. 이어서 서천군 한산으로 가 세모시 베 선물(先物)거래를 텄다.

인득이 이처럼 한양 사람들이 필요로 하여 값 차이가 많이 나는 귀한 품목들을 취급하여 늘려 나가고, 또 수하들을 잘 챙겨나가니 마침내 명실상부하게 독립되고 목포의 여러 객줏집들 중 기반이 가장 탄탄한 객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한양에 점포를 세우고 영광과 금산의 점포에서 올려온 건어물과 홍삼, 호남과 충청도의 여러 특산품을 사서 한양 여러 객줏집에 올려 파니 그 수익이 목상객주에서 버는 것 보다 많았다.

특히 인득은 돈의 여유가 있을 적마다 장인에게 건의하여 마포 나루에 있는 집 옆에 몇 채를 더 사 보부상들의 숙소로 써 비용을 줄이면서 숙박업도 운영케 하였다. 큰길가의 자리 중 일부를 특산품 큰 가게로 쓰고, 다른 자리는 세를 받아 내니 객주 운영수익과 더불어 재산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김상길은 사위가 이리 저리 머리를 써 수익을 더 내어 재산이 크게 늘어나게 하는 것을 보고 든든한 마음과 더불어 만족하여 등을 두드려 주었고, 인득도 순창 쪽은 모두 잊은 듯 지내며 장인장모를 친부모이상으로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효도를 다하였다. 그들에게 외손자를 안겨 주었다. 이미 두 돌이 지났다.

그러나병의 차도가 없이 보약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던 김상길은 이어 외손녀를 본 후 병세가 더 나빠지더니 아예 드러누웠다. 얼마 후데릴사위 인득에게 아내와 딸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예순을 못 채우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장모 윤씨가 딸을 부여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인득이 이제 나이 서른셋이 되었다. 그는 이전부터 자기 집안이 과거에 종의 신분이었던 것을 감추고 지낼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있었다. 우선 부모님(상진 부부)과 동생 부부를 순창의 서쪽으로 좀 외지게 떨어진 회문산 서쪽 쌍치면 한 마을로 이사하게 하였다. 적성의 논과 집을 모두 처분하니 그곳에 더 많은 땅을 살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열두 두락을 더 사 드려 서른 두락이 넘는 부자가 되었고, 동생 부부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득의 여동생이 동네 유지의 둘째 아들과 혼인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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