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29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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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29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3.1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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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29

 

이튿날 인득이 금산에서 문상을 마치고 홍삼공장을 둘러 본 후 주운복을 찾았다. 운복은 삼을 말려 백삼을 만드는 곳에서 인부로 일하고 있어 좀 곤궁하게 살고 있었는데, 운복이 뜻밖에도 초연이 성이 진씨인 것을 두고 부모를 오해하며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인득은 진내공과 주씨 부부간에 일어난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면서 초연에게는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하였다.

홍삼공장을 둘러본 운복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득은 봉씨의 큰아들에게 계속 홍삼을 만들게 하고, 고모가족이 판소리를 부르고 제자를 가르치는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 공장을 고모 명의로 바꿔 놓았다. 그간의 수익금을 정리하여 따로 챙겨 놓은 후, 운복에게 수익의 절반을 매년 남원 여동생(초연)에게 보내는 조건으로 홍삼제품의 매매를 넘기자 운복이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닷새 후, 인득이 운복을 데리고 와 은로 가족 모두가 자리를 같이하면서 금산공장의 문서를 은로에게 넘겼다.

그리고 고숙, 이 다섯 칸 기와집 그냥 이대로 둘 겁니까? 뭐 고치든가 다시 짓든가 하세요. 돈은 고모님에게 맡겨 놓겠습니다. 그리고 운복이는 이곳 가족들의 양식과 생활비를 올려드려야 허네.”

 

적성강변의 논 소작을 놓은 지 어느덧 3년이 다 되었다. 사량리 개간을 거의 마무리 할 무렵, 명진으로부터 땅 문서를 정리하러 오라는 기별을 받은 인득이 순창으로 향했다.

지 생각인디요. 아흔 닷 마지기 논 중에 이 윗배미 서른 마지기는 당시 그 면천비용으로 사 놓은 거니께 당연히 대부님 몫입니다요. 그러고 이 중간 서른 마지기는, 개간허가를 받으시고 공사도 맡으시고 물길도 트시고, 하여튼 여러 역할을 허셨으니께 대부님이 가지셔야 될 것입니다요. 낭거지 아랫 배미 서른 닷 마지기는 제 소유로 허겠습니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당시 내가 면천비를 받지 않았는데, 그리고 개간허가야 자네가 준 돈으로 그저 관아와 교제해서 받은 건데 내 역할이 뭐 대단하다고 그 많은 논을 따로 더 받는단 말인가? 이치가 안 맞는 말을 하고 있네. 날 뭐로 보고 이.”

인득이 아버지(상진)의 생각이라며 설득하고 사정하여 면천비로 산 땅을 명진의 명의로 정하였지만, 중간 서른 마지기를 놓고 다 받으셔야 합니다요.’, ‘못 받네.’라며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늦게야 명진이 결론을 내듯 말했다.

내가 열 마지기만 받겠네. 나머지는 자네 것으로 하세, 더 이상은 안 돼.”

하아. 제가 졌습니다요. 다만, 이 스무 마지기 소작료는요, 그 절반만 저에게 주십시오. 아랫배미 서른 마지기는 소작농들에게 싸게 넘길 생각입니다.”

 

사랭이의 개간 일을 다 마무리 한 동짓달 하순, 사랭이 마을에 앞뒤로 네 칸짜리 기와집 두 채가 지어지고 있었다. 마름 박씨의 주도아래 마을의 동네 장정들 열댓 명이 나와 기와를 올리고 벽을 발랐다. 이어서 대문 옆으로 세 칸짜리 행랑채와 곳간을 다 지은 후 인득은 해남에 있던 가족들을 모두 이사 오게 하였다.

인득이 유지 손진관에게 상량문을 부탁하였다. 대들보에-머리에 ()’자를 거꾸로 쓰고 밑에는 귀()‘자를 써 서로 머리를 마주보게 하고, 가운데에 모년 모월 모일 입주상량(立柱上樑)이라 쓴 다음, 그 밑에 2줄로 응천상지오광(應天上之五光), 비지상지오복(備地上之五福)‘이란 글귀(하늘에서 오광으로 응하여, 땅에서는 오복을 주시옵소서)를 넣어 축원하는-기다란 상량문을 붙였다. 동네 유지들이 보는 가운데 상량식을 거행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큰 돼지를 세 마리나 잡아 거나하게 잔치를 벌였다. 아내 숙영이 과방(果房) 앞에서 동네 아이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이뻐하면서 깨잘(과줄)을 한 움큼씩 집어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한 달 후, 행랑채에 큰 방 하나를 내어 동네 훈장을 모셔 서당을 열었다. 양반 집안이었으나 지금은 향반이 된 권씨를 훈장으로 모셔 후한 월사금을 주면서 아들 부현(치승의 부)을 가르치게 하였다. 동네 또래 아이들 여남은 명을 오게 하여 글동접(동접(同接글동무)으로 삼아 같이 글을 배우게 하니 동네 사람들과 친교를 맺게 되고 덕분에 인심이 좋다는 평판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손진관을 통해 관아와 교제를 계속 이어나갔다. 인득은 유두(流頭 음력 6월 보름)와 백중(百中 음력 7월 보름) 한여름에 사량리 강가에 차일을 치고 고을 향리들을 초청하여 사설시조(辭說時調)를 지어 읊고 물놀이를 즐겼다. 풍악을 울리고 기생들에게 남도민요와 춘향가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대보름과 한가위 때에는 인득이 사당패를 불러와 동네 사람들을 집 마당에 모이게 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줄 타는 것을 사람들이 가슴을 졸이다가 와 하고 함성을 지르고, 등에 베개를 넣어 춤을 추는 곱사등이를 보고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대고, 흥겨운 농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상쇠놀음(상쇠가 꽹과리를 치며 상모를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며 춤을 추는 흥겨운 놀이)에 박수를 치고 이어 사물(꽹과리, , 장구, )이 어우러져 자진모리장단이 나오자 술을 마시고 흥이 난 사람들이 이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처음엔 점잔을 빼던 인득과 아내 숙영도 사람들 속으로 스스럼없이 들어가 어깨춤을 추고 흥을 내며 농부가와 육자배기, ‘아리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낫네,’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같이 어울렸다. 잔치는 어느 덧 휘모리장단으로 이어지며 절정에 이르렀다.

 

그 해 가을걷이가 끝난 상달 하순, 인득이 훈장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는 명분으로 저녁 술상을 푸짐하게 마련하여 동네 유지 대여섯 명과 덕담을 나누는 중에 훈장이 넌지시 물었다.

소문에 들으니 한양 북쪽 고양에 사시다가 내려 오셨다고? 본이 초계라 했소?”

? , 합천 초계 정가입지요. 천호장공파입니다요.

. 윗대 어른들 중에 벼슬하신 그러니까 충청관찰사를 지낸 분이 계셨다던디 호가 어찌 되시오? 그 묘소는 어디에 있소이까?”

? 그럼요. 그분이 우리 중시조 되시는 분이시지라우. 경기도 고양에 묘소가 있지라우. 재작년 상달 묘사에 가보고, 요새 바쁘다보니 가본 지 오래 되얐네요. 내년 가실에는 가 봐야겠구만요. 흐흠!”

! 그렇구만요. 근디? , 됐습니다. 으흠.”

훈장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다소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술상을 파한 후 인득은 뒤끝이 좀 찝찝한 기분이 들면서, 그간 아내와 자식들에게 양반집이라고 말하며 입단속을 해 왔지만, 까딱 잘못하여 종의 신분이 탄로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아니, 훈장은 이미 우리 집이 양반집이 아니라고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쌓이며 고민이 되기 시작하였다. 동네에서 소작료를 적게 받고 가난한 사람에게 가끔 나락 가마라도 쥐어 줘 인심이 좋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지만, 양반의 눈초리는 피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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