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16회-정문섭
상태바
[연재소설]인연의끈 16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3.12.05 1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6회

이런 가운데 양반사회가 변질되고 있었다. 외척의 세도정치로 인해 능력 있는 양반들이 관가에 진출하지 못하고 낙향하여 향반(鄕班:시골로 낙향하여 여러 대 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양반)이 되고, 더 못되면 잔반(殘班:집안세력이나 살림이 보잘 것 없어 변변치 않은 양반)으로 전락하는 일이 많아졌다.

최하위 신분층 천인, 예전부터 노비들은 해야 할 의무만 있을 뿐 권리는 하나도 없이 물건이나 가축과 같은 재물에 불과했고, 평민과 다툼이 있을 때에도 일방적으로 억울하게 가혹하게 차별을 받아야 했다. 당시 사노비(私奴婢)에는 솔거(率居)노비와 외거(外居)노비가 있었다. 솔거노비는 글자 그대로 주인과 같이 살거나 옆에 거주하면서 주인에게 무제한의 봉사와 노동을 해주면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노비였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같이 살지 않고 밖에 따로 나와 지내는 노비로서 신공(身貢)만 바치면 되었다. 경제적 능력이 있으며 상전의 농지를 소작하거나 수공업 등에 종사하였다.

이처럼 신분질서와 경제체제가 점차 변해지며 일거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솔거노비들 중에 경제적 능력과 수완이 있는 노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인의 권유를 받아들이거나 스스로 원해서 독립해 나가 외거노비가 되고 있었다. 외거노비가 된 후 경제적 능력이 좀 커지면 면천을 원했고, 주인과 타협을 통해 일정액의 면천비용을 내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무능한 솔거노비들은 그저 현실에 안주하거나 호구지책으로 그냥 주인집에 들어붙어 있으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비들도 세상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도 덩달아 변화해가고 있었다.

 

초계 정씨 방계 18세손 경혜가 밀양부사를 거쳐 남원부사를 지낸 이후 순창 적성 땅에 정착한 그 후손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변변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여 향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24세손 25세손 때에 벼슬도 없이 살다 보니 대대로 내려오며 짓던 논밭이 점점 줄어들어 집안 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었다. 26세손 정명진(기준의 5대조)에 이르러 논 스무 두락이 좀 넘는 일반 자영농 수준으로 전락하면서 그간 데리고 있던 노비들을 모두 다 건사해낼 형편이 되지 못하는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동짓달 초순, 정명진이 식솔이 좀 많은 솔거노비 들쑥(치승의 증조)을 불렀다. 평소 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온 그를 따로 부른 것이다.

들어 봤는가? 어제 장에 가봤더니 말이여. 옛날과 많이 달라졌드만, 못 보던 물건도 많이 나오고 봇짐 장사치도 많아 지법 복작거리더군. 인자는 여느 양반들처럼 에함 해감서 살기가 팍팍해졌어. 팔 걷어붙이고 쬐그만 공장이라도 차려 가꼬 장사라도 해볼 것인디.”

에이, 대대로 양반 집이신디 그런 천헌 일을 어찌. 안 돼지라우.”

그래 말이여. 양반이 어디 밥 멕여 준다든가마는, 이보게 들쑥이.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 사정이 할아버지 때부터 조금씩 기울거져서 인자는 식구들이 먹고살아야 할 것을 근심할 지경이 되었네그려. 자네들도 걱정이 많을 거시여. 이를 어찌 생각하는감?”

주인님, 지가 주인님 집안 사정을 어찌 몰르것습니까요? 저의 저 윗대로부터 지금꺼정 주인님 밑에서 지내와 그 은혜가 참 컸습지요. 지금 저희 식구들이 일곱이나 된께 양식만 더 축내고, 지송한 마음 어찌 말로 다 할 수 없구만유. 다만, 저희가 뭘 모아 놓은 것도 없고이 지금 나가면 당장 살 집도 돈 벌이 할 곳도 없으니께, 그렇다고 지리산 화전민으로 나가 살 수도 없고이, 더욱이나 동냥질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여라우.”

내가 어찌 그 사정을 몰르겄는가? 우리 형편이 더 나아질 기미가 업써붕게 앞으로 자네 식구들도 어차피 따로 나가 살아야 하지 않겠나싶어 한 말이네. 앞으로이 좀 고민을 혀 보고, 각자 살아갈 방도를 찾아 봐야 할 거시여.”

 

들쑥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집에 들어와 식구들에게 주인 명진으로부터 들은 것을 말했다. 들쑥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대대로 주인집의 밥을 얻어먹고 살아 왔는디 인자는 그것도 어렵게 되었구나야. 당장은 아니 되더라도 인자부텅 나가 살 방도를 찾아야하지 않겄냐이?”

그려야 쓰는디. 이 양반이 지난 초여름에도 이 얘기를 하등만 또. 근디 지가 이미 마흔이 다 되어 어디 가서 일할 곳도 마땅찮고, 아무래도 어디 객줏집에라도 빌붙어 보부상이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헌디요이.”

어허, 니 몸도 션찮은디 그 무거운 짐을 어찌 지고 사방천지로 돌아 댕긴단 말이냐? 이 근방도 아니고 한양 부산으로 대구로 목포로 멀리 객지로 싸돌아 다녀야 헌다던디 그게 될 일이냐? 거그다가 니는 평생 이 촌구석에서 땅만 파 묵은 시상물정 하나도 모르는 쑥맥인디, 거간도 하고 사고파는 장사꾼이 된다고? 그런 일에 뛰어들었다가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여. 어려운 일이제. 아서라 야.”

이때 손자 억새(치승의 조부)가 앞으로 나섰다.

지가 아부지를 따라 갈게라우. 지도 인자 열여섯인디 맨 날 땅이나 파고 살 수는 없지 않겠어라우? 아부지를 따라 젊을 때 시상 돌아가는 것도 좀 배워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유? 지금처럼 종으로만 살고 싶지 안탕께요. 지도 나가 살고 싶어라우. 할아부지.”

들쑥은 뭔가 불만이 많은 듯 말하는 아들 억새를 보며 움찔했다. ‘종으로만 살고 싶지 않다.’ 들쑥은 순간 예전 자기 스무 한 살, 종의 집안이어서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던,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일들이 떠오르며 몸서리를 쳤다. 아버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왔다.

어떻게든 어떻게든지 종의 신세를 벗어나야 해. 나야 그러지 못하더라도 자식들에게까지 종놈으로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어느 세월에어떻게 해서

아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이 참에 하여튼떡이 되건 밥이 되건 나가고 봐야 헐 거시여. 아암!’

 

들쑥이가 마침내 주인 명진에게 어디 포구든 객줏집 보부상으로 나가겠다는 말을 하였다. 이듬해 설이 지난 어느 날, 명진이 전라도 영광 법성포와 목포에 있는 객줏집 두 곳을 알려주면서 각각 추천쪽지를 써 주었다. 정월 대보름 나흘 전 마침내 들쑥은 괴나리봇짐을 두 어깨에 메고 아들 억새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두 부자(父子)는 새벽 일찍 출발하여 팔덕 강천산 오른쪽 산골길을 거쳐 복흥면 남쪽 백양산 아래 길을 따라 걸어 해거름에야 겨우 장성 서쪽 황룡강변의 한 주막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또 고창 남쪽 매산과 칠암을 지나 밤늦게야 영광 법성포구에 이르렀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적성 고원 출생

-적성초(27회), 순창중(17회), 순창농림고(25회),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어학연수원(중국어),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관리과정 수료

-1981년 농수산부 행정사무관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