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1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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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1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3.08.09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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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 정문섭 박사의 장편소설 ‘인연의 끈’ 제1회

1부 : 인연

제 1회 

1부 : 인연

아버지 길연의 사연

1981년 초여름, 정기준이 서른 나이에 중앙부처 사무관 특채임용고시에서 최종합격통지를 받았을 때 임용기관이 호적등초본을 요구했다.

본적지인 순창군 적성면 고향에서 동생이 보내온 호적자료는 이전에 받아봤던 것과는 달리 다섯 장이나 되고, 왜정 때부터 써 온 서식에 손 글씨로 한글과 한자(漢字)가 섞여 쓰여 있었다. 호기심이 일어난 기준은 첫 장부터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치선과 할머니 윤씨 이름 밑에 자식으로 장연이라 나와 있었는데, 그 위에 行不(행불)’이 쓰여 있고 가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 부인 김현순도 사망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다음 장에 아버지 길연이 나오고 어머니 장정임이 옆에 나란히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장에 1951년생인 기준과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에 이어 육남매의 이름들이 줄줄이 나왔다.

 

기준은 초가을 추석을 맞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귀성 길에 나선 수많은 차량들이 새벽부터 붐비기 시작하니, 그들이 탄 고속버스는 거의 일곱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천안을 지나고 있었다. 칭얼거리던 아이들이 이제 잠이 들고 둘은 순창 고향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길연의 옛 얘기와 기준의 어린 시절, 도시생활만 하며 자라온 아내는 마냥 신기한 듯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덧 남원버스터미널이 보였다. 기준과 아내는 막내 동생의 옷과 과일이 담긴 보따리를 챙기며 아이들을 재촉하여 다시 대구-광주버스에 올랐다. 비홍재를 넘어 멀리 채계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독집 삼거리를 지나니 먼저 섬진강이 보이기 시작하고 왜정 때 세워진 긴 원다리를 건너니 섬진강변의 들이 넓게 펼쳐졌다.

! 고향. 좋다 좋아. 어느 때든지 오고 싶었던 곳! 기준이 어릴 적 뛰놀던 모습들을 언뜻언뜻 되살리고 있는데,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섰다. 정류장 큰 점빵 앞에 마중 나온 많은 사람들 속에 키 큰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메!, 형수님. 아침 여섯 시에 출발했담서 인자사 오시네요이. 열 두 시간도 넘게 걸려부렀네요이. ”

아이들이 삼춘 삼춘하며 안기고 마당까지 훤히 불이 켜진 집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튿날 차례를 지내고 기준은 호적자료가 왜 그리 되었는지 부모와 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길연)는 평소와 달리 뭘 숨기다 들킨 것처럼 좀 당황해 하였다. 어머니도 예전과는 다소 다른 눈으로 아버지와 기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가 잠시잠깐이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니는 왜 그러세요? 뭐예요?”

, 아녀어. 아무 것도. 갑자기 옛날 얘기를 들응게 좀. 으흠!”

헛기침을 하던 길연이 잠시 후 뭔가 결심하신 듯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를 문지르더니 이윽고 입을 떼셨다.

그러니께, 사실은호적에 나온 그대로여. 장연 이분은니 큰아부지이시여.”

? 저희들에게 큰아버지가 계셨다고요? 행불로 쓰여 있는 이분이 바로?”

그려어, 행불이제. 6.25때 납북되셨제. 나보다 세 살 위시여. 살아 계신지 모르겄지만, 시간이 좀 지낭게 면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해불자 허드라. 너무 불행헌 얘기라 그간 너그덜헌티 다 말해주지 않았던 거여.”

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초계 정이니 파가 뭐이니 뭐 이런 얘기 말고요. ! 큰아버지. 처음 듣는 얘기라 좀 당황되네요.”

그러게 말이다. 기왕 얘기가 나왔승게 시방 다 털어 놓끄마. 이전에 숙부님들이 해주신 집안 내력도 있고, 성님(장연)에게서 들은 거에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줄랑게 좀 들어 보거라이. 으흠.”

길연은 손을 맞잡고 옛일을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가 입을 떼셨다.

 

족보에 따르면, 고려 초 합천 초계(草溪) ()씨 시조 광유후(光儒侯) 정배걸(鄭倍傑) 이래 방계 13세손이 충청관찰사를 지냈다. 그 직계후손인 18세손 4형제 중 넷째인 경혜가 조선 중엽에 밀양부사로 지내고 말년에는 남원부사로 부임한 후, 그 자손들이 섬진강을 끼고 채계산이 마주 보이는 전라도 순창 적성 땅에 정착하여 대대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왔다.

조선 말기에 태어난 도현(28세손, 기준의 증조)은 윗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나중에 더 많은 논을 늘려 아흔 마지기가 넘은 논을 가진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재산을 그리 늘려 가지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김제평야나 나주평야처럼 너른 들녘과는 달리, 사는 사람이 많은 섬진강 주변 적성들에서는 논이 서른 마지기만 넘어도 부자 소리를 들을 때였으므로, 관내 사람들이 도현 집안을 큰 부잣집이라고 불렀다.

도현은 장남 치선(29세손, 1899년 출생, 기준의 조부)이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인근 유등면에 살던 파평 윤씨의 딸과 혼인을 시키고, 이듬해 차남 치용과 삼남 치곤의 혼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도현의 지병이 갑자기 도지고 나빠져 쓰러졌다.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1년을 못 버티고 사십대 초반에 작고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 평택 임씨(치선의 모친)도 상심이 커 그해 초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은 치선은 모든 게 막막했다. 우선 부모의 장례를 다 치르고, 그 이듬해 가을에 두 동생의 혼례를 서둘러 올렸다. 이어서 아버지 도현의 유언에 따라 머리가 영특한 막내 치만을 담양의 한 유명 서원에 보내 유학(儒學)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정이 많은 또 장남의 숙명을 담담히 받아들인 치선은 여러 생각 끝에 여동생 선옥의 몫과 종답 일부를 남겨놓고 나머지 재산을 사분(四分)하여 4형제가 똑같이 나누어 가지게 하였다.

그런 얼마 후 1919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2년이 지날 무렵부터 치선의 집안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치선이 무슨 이유인지 논을 팔기 시작하고 주막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영문을 전혀 모르는 두 동생이 그런 형을 만나 따지고 타박하며 다투는 일이 되풀이되고, 치선의 장남 장연(30세손)은 부모가 다투는 것을 보고 서럽게 울었다.

치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이기지 못하고 몸이 더 나빠져 쓰러졌다. 약값 댈 돈도 없이 가난해진 치선은 변변히 치료도 못 받은 채, 장연이 열 살 길연이 일곱 살 되던 때 서른 나이에 결국 작고했다. 치선이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거덜 내고 젊은 나이에 아내 윤씨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뜨고 가난해진 윤씨가 생계를 위해 장터를 오가며 행상에 나섰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아 하루 한 끼도 찾아먹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윤씨가 어느 날 두 아들을 두 시동생과 막내 동서에게 맡기고 남원에 행상을 나간다.’라 말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장연이 열세 살 길연이 열 살 때였다.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두 형제는 어쩔 수 없이 두 숙부 밑에서 기식(寄食)하게 되었다. 치용 숙부가 먹고 살만 하였지만 친아들 구연(길연보다 한 살 아래)과는 아무래도 차별을 두었고 소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구연이 아래로 줄줄이 자식들을 둔 숙모는 두 조카에게까지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숙모들은 걸핏하면 두 조카를 거칠게 타박하였다. 옷도 제대로 입히지 않으면서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해 밥값도 못한 놈이라 하며 밥을 주지 않기도 하였다. 부모가 없는 두 형제는 마냥 배고프고 추운 그리고 앞날이 막막한 세월을 기약도 없이 보내야 했다.

당시 다행하게도 같은 동네 권씨 집으로 시집을 간 선옥 고모가 두 조카를 챙겨주었다. 둘은 힘들고 외로울 때면 고모 집을 찾아갔고 그때마다 고모가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외롭고 서럽게 지내는 조카들의 아픈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또 아들 하나만 갖고 미망인이 되었던 인정 많은 막내 숙모가 겨울에 솜옷을 챙겨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던 두 형제가 헤어져야 하는 일이 생겼다. 장연이 열네 살 되던 정초 아침 일찍 방씨라는 사람이 치용 숙부를 찾아왔다. 그날 오후, 두 숙부가 숙모들과 고모 선옥을 모두 사랑채 앞에 모이게 한 후 장연을 불렀다.

장연아. 이분은 먼 친척 되시는 방씨 아재니라. 오늘 이 분을 따라 가그라이. 니를 공부시켜 줄 거싱게 잘 따르고 열심히 공부해야 써. 이 숙부 밑에서 그간 고생이 많았제? 미안허구나. 그려도 니는 우리 집안의 장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이. 나중에 니가 장가갈 나이가 되면 다시 고향에 와야 혀. 니 결혼만큼은 내가 주관해 올려 줄 거싱게. 그리 알그라이.”

선옥 고모가 장연의 손을 꼭 잡고 훌쩍이며 당부의 말을 하였다.

아이고. 객지에 나가는 니가 걱정이 되는구나. 부디 몸 성히 잘 지내야 된다이. 혹시 무신 어려운 일이 있으믄 이 고모를 찾아 와야 혀.”

의지하고 지내던 형을 떠나보내게 된 길연의 가슴이 무너졌다. 울며불며 같이 가게 해달라며 떼를 쓰고 울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형제는 이렇게 졸지에 떨어져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방씨 아재는 장연을 데리고 곧장 전주로 올라가 풍남문 부근에 있는 한 한옥 하숙집을 정해 살게 하였다. 장연은 많은 것이 궁금하여 아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왜 자기를 친아들처럼 돌봐 주는지 여러 번 여쭤보았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빙긋이 웃으며 나중에 알게 될 거야.’라고만 말하고는 아무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당시 하숙집 아주머니가 얼핏 남원에서 쌀을 보내 왔네.’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났을 뿐이었다.

장연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어 선생이 일어를 잘해 유학을 가도 되겠다.’라고 칭찬하였다. 방씨의 친척인 김치승이란 사람이 장연을 동경으로 데려가 대학교에 입학시킨 후 돌아가고, 방씨는 학비를 계속 보내주었다. 장연은 농학을 전공하였다.

 

한편, 형이 떠나고 난 후 길연은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촌 동생 구연이 서당을 다니고 소학교에 들어갔다. 치용 숙부는 다른 사람의 체면도 있어 길연을 소학교에 보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긴 했지만, 아내가 줄줄이 딸린 자식들을 챙기느라 조카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으므로, 길연이가 농사일이나 배우겠어요.’라고 말하였을 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가졌다.

길연이가 이처럼 숙부의 농사일을 거들며 숙모로부터 차별을 받으며 고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사촌동생 구연이 장가를 가게 될 거라는 얘기가 들렸다. 순서로 말하자면 길연이 먼저이겠으나 부모도 재산도 없는 천덕꾸러기인 길연을 위해 어떤 중매쟁이가 나서겠는가. 숙모도 그닥 관심을 갖지 않으니 길연은 어쩔 도리 없이 그저 속만 끓이고 있었다. 새경 좀 받겠다고 숙부 곁을 떠날 만큼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제수의 눈치 밥을 얻어먹어야 할 처지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한심하고 창피하였다. 아무래도 사촌제수로부터 시숙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할 것 같아서 난감해하던 길연에게 마침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면청 앞 정문에 붙여진 <일본북해도광부모집> 벽보를 본 것이다.

스무 살 길연은 마침내 면내 몇몇 가난한 처지의 또래 십여 명과 같이 현해탄을 건너 멀리 북해도(홋카이도) 탄광에 들어갔다. 북해도는 일본의 최북단으로 가장 춥고 눈과 바람도 많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도 척박한 곳이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물자 자원을 캐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길연 일행은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은 <헤이와 탄광> 옆에 있던 비좁은 창고 방에 집어 넣어졌다.

일본인 십장은 조선인 광부들을 막장 맨 앞에 몰아세우고 아침 일곱 시부터 열두 시간 동안 메마른 주먹밥 두 개를 주면서 일하게 하고, 목표량에 미달되었다 하며 자정까지 강제로 일을 시켰다. 탄광내부의 안전장치가 허술하거나 가스가 폭발하여 매몰되어 죽어 나가는 자와 부상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일하고 같이 잠을 자던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매몰되고, 탄광측은 매몰된 광부들을 다 구출해 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폐광 처리해 버리고 있었다.

* 2005815일 서울신문 보도(요약) : 일본 홋카이도 비바이 탄광 매몰 한국인 64년째 방치 - 1939-1944년 홋카이도 탄광 사고일지 : 1939.12.1 탄광기선주식회사 조선인 4명 등 13명 사망, 1940.1.9 탄광기선주식회사 조선인 6명 등 55명 사망, 1941.2.13 아사지노우류탄광 조선인 7명 등 27명 사망, 1941.3.18 미쓰비시 비바이탄광 조선인 32명 등 177명 사망, 1942.2.13 미쓰이 스나가와탄광 조선인 10명 등 42명 사망, 1942.7.30 탄광기선주식회사 조선인 11명 등 17명 사망, 1944.5.16 미쓰비시 비바이탄광 조선인 71명 등 109명 사망

 

길연은 매몰되어 죽어 시체도 못 건진 친구가 꿈에 자주 나타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길연은 이러다가 어머니와 형을 보지도 못하고 죽겠구나 싶어 탈주할 생각도 가졌다. 그러나 탈주를 하던 사람마다 족족 잡혀 감옥에 가거나 다리가 부러져 돌아오는 것을 보고 포기하였다. 노임이라는 게 있었지만, 두 평도 안 되는 비좁은 창고 방에 열 명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칼잠을 자게하며 밥도 국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밥값이니 애국성금이니 별의별 명목으로 떼고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19458, 마침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치용은 추석이 다 되어가도 돌아오지 않는 조카들을 걱정하고 있다가 헌칠하게 자라 말쑥하게 양복을 입고 온 조카 장연을 기쁜 마음으로 맞으며 대견해 하였다. 그러나 동생 길연이 북해도 탄광에 갔었다는 얘기를 듣고 망연자실하며 눈물을 짓는 장연을 보고 치용 부부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장연이 동생을 찾으러 다시 일본에 가야겠다고 나서는 것을 좀 기다려 보자며 말리고 있었다.

한편, 길연이 4년 반 만에 탄광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같이 갔던 고향 사람 열두 명중에 천행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몸이 제대로인 사람이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파 근처 밭에서 감자를 훔쳤다가 십장한테 매타작을 당한 두 사람 무수리 이씨와 대산리 신씨는 여러 곳에 피멍이 들고 영양실조에 걸려 잘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연장자인 가목리 전씨가 어떻게든 다 같이 돌아가야 한다며 십시일반 하여 밥을 챙겨 먹이고 약을 먹여 봤지만, 결국 한 사람 신씨가 세상을 떴다. 이로 인해 귀국이 거의 한 달이 늦어진 다섯 명-길연과 가목리 전귀동, 황상운, 무수리 이씨, 임동 최순호-이 이틀간 열차를 타고 내려와 후쿠오카항에서 사흘을 기다린 후 겨우 배에 올랐다. 그러나 이씨는 부산 땅을 밟지 못했다.

십오여 년 만에 만난 두 형제는 울며 서로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장연은 만신창이가 되어 온 길연을 밤낮으로 챙겼다. 길연이 몸을 가누고 겨우 기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거의 한 달이 지나 가을추수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적성 고원 출생

-적성초(27), 순창중(17), 순창농림고(25), 육군사관학교(31·중국어 전공)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어학연수원(중국어),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관리과정 수료

-1981년 농수산부 행정사무관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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