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8회-정문섭
상태바
[연재소설]인연의끈 8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3.09.27 08: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3월 초순, 호남의 남원, 순창, 고창, 보성, 영광, 강진, 해남에서의 일정을 마친 금요일 점심 후, 기준은 일행을 광주 송정역에서 전송하였다. 과장에게는 사전에 아버지 병환을 말하며 연가를 내었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순창을 향했다. 순창읍 차부에서 택시를 타니 십 여분 좀 지나 풍산농협에 도착하게 되었다. 헌칠하게 키가 큰 권영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준은 온 가족이 모인 방에 들어가 선옥 고모할머니께 넙죽이 큰 절을 올렸다.

 

니가 장연이 동생 길연이 아들이라고? 이리 출세를 한 아들을 두다니! 아이고 이게 뭐냐? 이 귀한 굴비를 두 두름이나~. , 니 아부지는 어찌 지내느냐?”

선옥 할머니는 걱정한 것과는 달리 허리도 꼿꼿하고 목소리도 힘이 있었다. 기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녀의 손을 꼬옥 잡으며 기쁜 웃음을 지었다.

고모할머니. 진즉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제야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요.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배고프고 추워 떨며 어렵게 지낼 때 고모할머님을 찾곤 했는데, 그때마다 밥도 챙겨 주시고따뜻한 아랫목에 재워주시고, 가끔 말씀하셨어요. 아들로서 감사한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아이고, 니 아부지가 그런 말도 허더냐? 새삼시럽기는, 내가 뭐 잘한 것도 없는디. , 니가 뭘 알아보것다고 했다든디 그거시 머시냐?”

그가 큰아버지 장연이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나게 된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버지가 방씨와 그분을 찾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는데, 제가 자식 된 도리로서, 그 은인을 찾아 만나드리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궁금한 게 참 많아요. 아시는 대로 말씀 좀 해주세요. 할머니.”

그려어 맞아! 그런 일이 있었제. 길연이가 울고불고 난리였다니께. 큰 오빠(치선)가 정이 참 많으셨는디 그만 병들어 일찍 돌아가시고, 흑흑. 그때 생각을 하믄,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구나야. 그 방씨? 내 알고말고. 작달막한 키에 눈이 탱글탱글했제. 이 굴비를 봉게 생각이 더 잘 나는구마이. 그 방씨와 은인을 찾아야제, 아암. 우선 내가 허는 얘기를 들어보거라이. 니가 뭐 좀 빨리 알아냈으면 좋것구마이.”

 

장연이가 방씨를 따라 그리 집을 떠난 후, 선옥은 둘째 오라버니 치용에게 조카 장연의 소식을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을 들었다.

잘 지내고 있을 거니께 걱정 말그라이. 남원 사는 부자 일가가 잘 키우고 있고, 전주에서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일본유학도 보내준다고 해씅게, 그 애한테는 오히려 잘 된 거여, 아암.”

광복이 되어 돌아 온 장연은 어느 덧 스물여섯 살의 헌헌장부가 되어 있었다. 길연도 죽음의 문턱에서 지긋지긋하게 고생한 북해도 탄광을 벗어나 겨우 살아 돌아왔다. 장연의 혼사를 마무리한 뒤 치용의 생신날이 되어 온 집안 대소가 가족이 모여 잔치 밥을 먹었다.

~. 굴비를 먹게 되다니. 올케 언니, 어디서 난 거데요? 이 귀한 것을.”

, 그거? 강 건너 사랭이 마을 그 방씨 알잔혀? 장연이 결혼 세간들을 보내올 때에 딸려 보내 온 거랑께. 장연이 덕에 우리가 잘 먹네이. 호호.”

그 후 장연 부부가 서울로 가고 난 뒤, 선옥은 방씨의 소식을 더 듣지 못하였다.

 

그러고 말이다. 방씨가 니 큰 아버지 장연에게 논 너마지기를 사주셨는디 그걸 길연에게 넘겨 주었제. 하여튼 너그 아부지 어무이가 얼매나 근실했는지 몰러. 그 논을 시작으로 혀서 논을 더 늘려 낭중에는 스물 닷 마지기가 넘는 동네 부자가 되어 부렀어야. 자석들 다 서울로 유학을 보내 대학을 나오게 하고이 동네에서 그런 부모 보기 힘들어야. 대단했어야!”

할머니. 기억력도 정말 좋으시네요. 이리 생생하게 알려 주셔서 궁금증이 많이 풀리게 되었어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할머니, 오래 오래 사셔야 되요. 구순 생신 때 뵈러 올게요.”

야아 얘들아 머하고 있냐? 빨리 새로 밥 안치지 않고. 이 굴비 같이 구워 먹자구나. 호호!”

선옥 할머니는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왜정시대에 옛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라 없는 설움을 겪으며 불행하게 지냈던 일들을 얘기하였다. 특히 불쌍한 길연이가 북해도 탄광에서 죽다 살아 온 것은 조상님들이 돌봐준 것이었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였다.

 

방씨와 사량마을 노인들

기준은 남원의 방씨외에 부자 일가에 대촌면 사랭이까지 새로운 단서를 얻은 기쁨과 흥분을 가슴에 꽉 채운 가운데 권영헌의 차를 타고 남원 시청을 향했다. 저녁 퇴근시간이 지나 늦은 시각임에도 양 시장과 행정계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 사무관님. 이 호적자료 좀 보세요. 김 계장, 설명 해드리게.”

이거 보니까 좀 특이한 데가 있더군요. 여기 현재 남원에 살고 있는 모든 방씨들을 위로 추적해 보니 고조에서 다 모여요. 한 뿌리 즉, 모두 한 집안인 거죠. 여기 보세요. 대촌면에 살던 방석준이 세 아들을 둡니다. 첫째 기환은 대촌에 남아 두 아들을 두어 장남 방수길은 대촌에 남고 차남은 읍내로 나갔습니다. 둘째 주환은 운봉으로 가서 한 아들을 두었고, 셋째 세환은 산서로.”

잠깐만요. 대촌에 사랭이라는 마을이 있다던데, 그게 어디죠?”

사랭이? 김 계장. 거기가 어디지? 면소재지 사량리 그 마을 아닌가?”

맞아요. 옛 사람들이 사량리를 사랭이라 불렀나 봐요. 강 건너 서쪽은 바로 순창 땅이죠.”

그렇다면 그간 우리가 본 그 매실생산단지가 바로 대촌면 사량마을이 그 사랭이란 말이죠? 아까 거기 대촌에 남은 방기환 그분이, 살아계시나요?”

에이, 진즉 돌아가셨지요. 6.25, 좀 일찍 돌아가시긴 했네. 어디 보자. 장남 방수길이 그 마을에 살다가 작고했고 지금은 손자 방진호와 그의 동생들이 남아 있네. 1948년생으로 방기환의 직계손자이군요. 7년 째 그 마을 이장을 하고 있구먼. 어쩐지 눈에 익다 했지.”

양 시장의 설명을 들으며 기준은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리며 고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양 시장에게 이전에 말했던 방씨의 얘기에 이어 고모할머니로부터 들은 것을 다 말했다. 양 시장이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 다 되었네. 드디어 방씨를 찾았어! 방기환 그 양반이 돌아가시긴 했지만 자손들이 여기 남아 있잖아요. 이제 은혜를 주신 그분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네. 하하! 축하드립니다. 이리 합시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자고 내일 일찍 사량마을로 갑시다. 김 계장, 바로 방진호 이장한테 전화하고. ! 중요한 것은동네 노인들을 모이시게 하는 거네. 가능하면 나이가 지긋한 분들로 말이네.”

정기준 가계도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적성 고원 출생

-적성초(27회), 순창중(17회), 순창농림고(25회),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어학연수원(중국어),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관리과정 수료

-1981년 농수산부 행정사무관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