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라피 : 뜨레 정명남
삽화 : 권동현
인연의 끈
1부 : 인연
제 2 회
1946년 정월, 장연이 결혼을 하였다. 방씨가 찾아와 결혼자금과 세간을 보내왔다. 방씨는 장연부부를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면서 마포 나루터 부근에 있는 집에 살림을 차리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 치용 숙부가 길연을 동계면 수정 응지몰에 사는 흥덕 장씨 장영식의 둘째 딸 정임과 결혼시키며 집터를 마련해주고, 방씨가 논 너마지기를 사 주었다. 길연은 자기 논에서 나오는 소출에 재미를 느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난 1950년 음력 정월, 설을 쇠러 온 장연 부부가 길연 부부를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길연은 서울생활이 낯설고 불안할 것 같아 내키지 않아 했으나, 형의 학교 실습포장에서 일을 하면 집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월급수입이 더 나을 거라는 형의 설득에 솔깃하였다. 결국 사촌동생 구연에게 농사를 맡기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처럼 두 형제가 서울에 무사히 안착하게 된 것을 본 방씨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두 형제가 방씨에게 다가갔다.
“아재. 저희를 이처럼 키워주신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만요. 이처럼 집도 구해 주시고요이. 인자는 이야그 해주실 때가 된 것 아닙니까요?”
“어어! 그거… 말이여. 난 그저 심바람만 했을 뿐이란다. 너그들이…, 은혜를 갚아야 할 분은 따로 계셔어.”
“예? 다른 분이 계시다고요? 그분이 뉘신디요? 지발 좀 알켜 주셔요.”
“지금은 때가 아녀서 말 못혀야. 그 정도만 알고 있그라이.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시여. 어쨌거나 너그들이 여그 서울에 잘 정착해야 헌다. 장연이 니는 딴 생각 말고 학생들이나 잘 가르쳐어. 길연이도 말이여 여그에 정을 붙이고이 열심히 일해서 자리를 잡아 가야 혀. 그려야 은혜를 갚는 거여. 아암.”
아재는 엷은 미소만 지을 뿐, 말 못할 무슨 비밀이 있는지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일어난 6.25동란이 두 형제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파죽지세로 서울로 내려온 인민군은 당시 지식분자인 장연을 억지로 끌어들여 마포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감투를 씌워 주었다. 당시 내려 온 인민군 중에 동경에서 장연과 동문수학했던 평안도 친구가 본인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그리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군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9월 중순이 넘어가자 인민군이 급기야 철수를 하게 되었다.
“길연아. 니 잘 듣거라이. 나는 지난 몇 달간 인공치하에서 당 간부로 활동을 허는 바람에 그쪽 사람이 되고 말았어. 같이 올라가자 허는데 안 갈 수도 없고이. 안 간다허면 그냥 두겄냐? 참혹한 꼴을 당헐 수도 있을 것 같고, 여기 남아 있어 봤자… 결국 부역자(附逆者) 신세가 되어 잡혀 죽을 것이 뻔하단 말이다. 니 형수가 몸이 무거워 같이 갈수 없을 것 같여. 너그 부부도 여기 있다간 마찬가지로 나 땜에 잡혀가 곤욕을 치를 것이 불문가지여.
아무래도 니 형수와 같이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있어야 쓰것다. 쫌만 기다리그라. 우린 다시 와서 남쪽을 다시 해방시킬 거싱게 걱정말거라이. 니 형수가 곧 해산하게 될 건디, 그거이 질 걱정이 되는구나. 제수씨 잘 부탁해요. 너만 믿겄다이.”
결국 9월 24일 셋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겨우겨우 한강을 건너 고향을 향하였다. 그런데 천안 삼거리를 지나 공주로 걸어가던 중 장연 형수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길가의 한 빈집에서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형수가 하혈이 심해 이틀도 안 되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전쟁와중에 그 촌에 무신 제대로 된 병원이 있었겠느냐? 약도 먹을 것도 귀한 때라…, 아이도… 결국 죽었제. 그때는 아이들이 많이 죽어 나갔지. 달리 방법이 없었단다. 결국 공주의 한 산꼴째기에다가 시신을 묻어야 했어.”
“아아! 불행한 일이었군요. 젖이 없어 그 갓난아기도…, 하늘의 별이 된 거네요.”
길연과 장씨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아……! 우리는 낙담하고 너무 허망했어. 형님한테 죄를 짓고이. 그때 심정을 뭐라 말로 다 허겄냐이! 천신만고 끝에 우리가 고향에 도착은 혔지만, 형님은 끝내 돌아오시지 않았어. 인민군 그놈들이 다시 내려오지 못헌 거제. 그때 유엔군이 많이 오고 그려서 통일이 될 줄 알았는디…, 결국 휴전이 되어 뿐거여.“
“그러면 휴전 후 부모님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셨나요?”
“어딜…, 성님이 없는 서울에 무슨 정이 있었겠냐? 멋허게 올라가? 우리는 그냥 고향에 주저앉아 농사를 짓기 시작혔지. 너그덜 6남매를 낳고 키우며 오늘에 이르게 되어 뿐거여. 으흠.”
방문 앞 쪽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어머니 장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기준을 바라봤다. 길연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고 말을 마쳤다.
“참 불행한 일이었군요. 그러니까 큰 아버지 그분의 생사를 지금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인데, 아버지 연세로 볼 때, 그분이 예순 한 두 살 쯤 되셨을 거니 북쪽 어딘가에 살아계실지도…? 그쪽에서 자식을 두셨을 수도 있겠고요. 그죠? 당시 큰어머니도 그 자식도 다 그리 되었으니 아버지 마음도 참…, 얼마나 힘드셨어요?“
이때 어머니 장씨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기준을 쳐다봤다.
“어머니도 그 전쟁 통에 저를 낳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요?”
“으응…, 그랬지 아암. 너그 어무이도 이태꺼정… 참 힘들게 살았제. 흐음!”
“그런데 아버지. 그 방씨, 고마우신 그 아재는 어찌 되셨어요? 그 이후로도 찾아오셨어요? 만나셨어요?”
길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렸으면 얼매나 좋았겄냐이…, 그 아재가 안 나타나 뿐 거여. 발길을 끊은 게야. 당시 내가 아는 건 남원 사람 방씨라는 것뿐이었제. 나도 참 한심혀야.”
“예? 어찌된 거죠? 왜 안 오신 거예요? 그 아재가 이곳도 알고 계실 거 아녜요. 아아! 그 아재를 찾지 못하면…, 은혜를 주신 그분도 어디 사는 누구이신지를 알 수가 없잖아요.”
“맞어. 니가 문제를 잘 짚은 거여. 우리가 그 아재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분이 따로 계시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더 이상은 알지 못 혔지. 나중에 내가 궁금혀서 치용 숙부에게 방씨 아재가 뉘시고 왜 이제는 안 오는지, 또 그분이 누구인지를 여쭤 봤제. 그 양반이 뭘 아는 것 같긴 혔는디…,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드란 말이다. 그 후 치용 숙부가 환갑이 지난 얼마 후 돌아가시는 바람에 방씨 아재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게 되어뿐 거여. 하여튼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끝내 듣지 못헌 것이… 바로 문제여. 물론 그 후 내가 그 아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제…, 근디 어디서부터 시작허야 헐지 막막하였고, 또 너그덜 6남매 자석들을 키워 나가다봉게 시간도 마음도 여력이 없었단 말이여. 결국 은혜를 주신 그 아재가 어떤 양반인지를 알지 못한 채 오늘꺼정 이르게 되었단 말이여. 이러다 정말로 그 은인을 찾지 못해 평생 한(恨)으로 남을까 걱정이 앞서는구먼.”
“그러셨겠네요. 남원이면 가깝기는 해도 무슨 꼬투리도 없이 맨 날 가서 찾아다닐 수도 없고…. 어떻게 생기신 분이셨나요?”
“지금도 얼굴이 선헌디 말이여…. 키는 작달막했지만 눈이 참 크신 분이셨제. 연세가 있으싱게 이미 작고허셨겄지만, 그래도 어쩌든지 그 아재의 행방을 알아내어 그 후손이라도 찾아야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그분을… 알아낼 거 아니것냐이? 그리고 너그덜 6남매가 모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다 그분 은덕이고 지금도 은덕을 입고 지내고 있는디 말이여….
니가 이제 중앙에서 농업과 농촌 일을 하는디서 일하게 되았으니 앞으로 지방 농촌에 갈 기회가 많을 거 아녀어? 혹 남원 근처에라도 뭐 일보러 가게 되면 무신 방법이 있을지…. 좀 생각혀봐라 야.“
“성만 알지 이름도 모르고 계신다? 남원까지는 나왔지만…. 하, 이거 ‘한양 김 서방 찾기’네요. 흔한 성이 아니긴 하지만…, 하여튼 제가 관심을 갖고 방도를 알아보겠습니다. 근데 아버지, 아까 저희들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 다 그분 은덕이라 말씀하시던데, 그게 무슨 얘기세요?”
“으응, 그거…. 기냥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런 말인 거여. 흐음.”
아버지 길연의 길고 긴 사연을 들은 기준은 어렵고 무거운 숙제를 받은 기분을 간직한 채 과천으로 돌아왔다.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적성 고원 출생
-적성초(27회), 순창중(17회), 순창농림고(25회),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어학연수원(중국어),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관리과정 수료
-1981년 농수산부 행정사무관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