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9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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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9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3.10.1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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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그날 밤, 기준은 감격과 기쁨으로 흥분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드디어 방씨, 그리고 은혜를 주셨다는 일가 부잣집!‘ 잠이 들었다 깼다가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아이고, 시장님. 시정(市政)에 바쁘신데 이리 일찍 나오시게 하고,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이런 게 바로 내 역할이죠. 관내에서는 누구든 내 허락 없이는 못 만납니다. 나중에 민선 시장 나갈 건데, 모두 다 내 선거구 표, 표 아닙니까? 하하!”

사량마을 경로당 앞에 한 사람-키가 그다지 크지 않으나 야무진 몸매에 눈이 큰 얼굴-이 기준 일행을 맞이했다. 바로 이장 방진호이었다. 방안에 나이가 지긋한 노인 세 분이 보였다. 기준은 가져간 음료수를 내려놓은 후, 노인들에게 큰 절을 올렸다. 이어서 그리고 방씨를 찾아내기 위해 나서고 있는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였다.

먼저 방진호가 말을 꺼냈다.

글씨요. 잘은 모르지만 우리 할아버지 이전 때부터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온 같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소파 방정환 선생과 먼 일가 간이었다.’라고 듣긴 했는데. 두 동생이 계셨다고 듣긴 했지만, 사실 그 후손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고 작은 아버지도 읍내에 사시다가 돌아가신지 꽤 되었죠.

제 네 살 때 그러니까 육이오동란이 나던 그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분 소싯적 일은 잘 모릅니다. 아버지도 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작고하시어 제가 뭐 들은 것도 별로 없고요. 아마도 여기 계신 동네 할아버지들이 더 잘 아실 거구먼요.”

~ 그러니께, 그 기환 그 냥반은 내 장형님의 친구였제. 눈이 크고 키는 짝달막했지만 야무지고 말이 별로 없으셨어. 과묵허신 분이셨제. 정 부잣집이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시키며 친 자식처럼 같이 대해 주셨어. 해방이 되고 얼마 후 그 양반들이 땅을 싸게 내놓았어. 덕분에 가난헌 소작농들이 다 자기 논을 갖게 되니 모다들 감지덕지했제. 사실 우리 집도 그때서야 소작을 면하게 된 거여. 그때 그 부잣집이 강변 논 열 닷 마지기를 따로 떼 기환 그 형님헌티 그냥 주었다드만. 그 주인이 인심이 후하기도 했지만 워낙 충직허니 일도 잘 해씅게 그리 많이 주신 기라. 그 후에도 계속 그 집안일을 챙기며 지냈었제.”

정 부잣집이요? 그분의 성함이 어찌 되지요?”

정치승이란 분이여. 형님이 한 분 계셨제. 치 머드라? 그분들 위에 할아부지가 계셨는디, 그 양반이 젊은 시절에 이 동네에 첫 발을 디디신 거제. 한양에서 온 양반으로 큰 부자였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 그분이 좀 오래 사셨어. 자네들도 생각 나잔혀? , 왜 칠순 잔치 때 이쁜 기생들이 셋이나 와서 노래도 부르고 장구도 치고 했잔혀, 하여튼 이틀 동안 큰 잔치를 벌였제. 온 동네 사람들, 애들까지도 벅적거리며 푸지게 먹고 춤추고 놀았어. 그분이 돌아가시고 작은 손자인 치승 그 분이 형님을 깍듯이 모시며 집안일을 도맡아 챙기셨제. 기환 형님은 자기보다도 어린 주인이었지만 끝까지 잘 모셨다니께.”

기준은 순간적으로 아버지 길연으로부터 들은 얘기 중에 있었던 김치승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점차 안개가 걷혀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치승의 형님 이름이 치준이여. 인정이 많으신 지주였제. 치승이는 나허고 동갑인디 일제 때 일본유학도 하고 군청에서 일하였제. 해방 후 그 두 형제들이 고생이 많았어. 친일파로 몰렸다니께. 그치만 소작농들이 많이 감싸주어 무사했제. 특히 육이오 때는 인민군 그놈들이 말이여 인민재판인가 먼가를 열어 가꼬 이 두 형제를 지주 친일파로 몰아 죽이려고 했는디,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죄가 없는 분들이시다.’라고 큰 소리치고, 기환 형님도이 주인을 감싸붕게 인민군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갔제. 그놈들이 화가 낭게 형님을 마구 두들겨 패 가꼬이 그 장독(杖毒) 때문에 그만 일찍 가셔부렀어. 참 원통할 일이었제.”

근디 치승 그 양반이 참 안 되었어. 딸을 낳고 아들을 하나 두엇는디, 해방되고 나서 그 외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얐어.”

? 그런 불행한 일이. 육이오 때? 뭐 어찌 된 건데요?”

그게 말이여. 해방 후 이년인가 삼년인가 지날 무렵인디, 외아들이 서울서 공부를 마치고 무신 바람이 불었는지 집에를 안 오는 거여. 아내와 쬐깐헌 딸이 하나 있었는데도 어쩌다 한 번 보이다가 육이오가 나기 얼마 전부터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제. 아들도 하나 뿐인디. 치승 그 양반이 손녀를 애지중지했지만 고추달린 놈이 아니라며 늘 허전해 하셨어.”

치승이 순경들헌티 지발 아들 좀 찾아달라고 돈도 쥐어주고 그랬던가 보드만.”

외아들이 없어졌으니 상심이 꽤 컸겠군요. 그러신 후 그 두 분은 어찌 지내셨나요?”

그 치승 그 분의 슬픔을 누가 헤아리겠어. 백방으로 아들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못 찾은 거야. 그리고 그 두 형제가 또 방씨를 생각해서 그 자식들한테도 땅을 좀 많이 주시드랑게. 동네 부자가 되게 허신 거제. 또 마을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웠겄어? 그래서 그때 강변 쪽 땅 3정보를 마을에 희사도 했잖은가?”

방진호 이장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들었다.

매실 밭 그 너른 땅을요? 이제 보니 지금 우리 집 강변 논들도.”

그려 맞아. 치승 그 분이 강변 황무지 자기 땅을 개간하여 매실을 심음서 동네 사람들에게 그 3정보에다가 매실을 심어라 권유를 했제. 온 동네가 다 나서서 두둑을 올려 매실나무를 심었제. 그 후에 사람들이 섬진강 줄기 따라 임실 저 강 상류부터 저 남쪽 광양까지이 매실나무를 엄청나게 심어대었당게. 우리 마을은 그 매실을 팔아 가꼬 마을회관도 짓고 말이여. 마을길도 넓히고 세멘토로 길도 닦았제. 덕분에 새마을운동 때 선도마을 그 칭호도 받고이 나라지원도 많이 받았다니께.”

근디 그 쌍팔년도(단기 4288) 지난 몇 년 후 하여튼 자유당 말 그 무렵에 치준 그 양반이 좀 일찍 작고하셨어. 그런 후에 치승 그분이 오일륙 나던 해 늦가을인가 그때 온 식구들을 챙겨갖고 전주 남고산 근처로 이사 갔었제. 매년 상딸(음력 시월)이 되면 그 양반이 자손들 다 델구 와서 시제를 지내고이, 돌아갈 때는 마을회관에 들러서 고기며 떡이랑 뭐 잔뜩 놔두고 가시고이. , 또 막걸리 사 마시라며 봉투도 주고 말이여. 허허. .”

! 그 양반들이 정말 인정이 많으신 분들이셨군요.”

그러제. 아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그 양반들 덕을 많이 봤다고 할 거여. 안 그런가? 자네들.”

아 그런 대단한 분들이셨군요. 그러면 그분 주소나 전화번호를 아시나요?”

전화 번호? . 거기 말이여. 내 한 번 갔다 온 일이 있었제. 남고산 그 큰 학교 앞 오른짝으로 한 이백 보쯤 가면 동사무소가 나오네, 거기서 물어 보면 잘 갈켜 줄 거시네. 일곱 칸 기와집, 정치승 어른 이름만 대도 다 알아.”

어르신들, 이리 많은 것을 알려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거기 전주에는 치승 그 양반 부부만 사시나요?”

딸이 있었잔혀. 그 딸이 진안군 이씨 집안에 시집갔는디 나중에 치승 그 양반이 딸네 식구덜을 다 전주로 불러들여 같이 살고 있능가보더라고. 그 외손자가 서울에서 일류대 나와 중앙에서 출세했다등만.”

많은 것을 알게 된 기준은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노인들에게 감사인사를 올리며 지갑에 있는 돈을 다 꺼내 방 이장에게 건네며 점심을 대접해드리라는 부탁을 한 후 차에 올랐다.

시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점심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내 맛집, 남원 추어숙회와 튀김 그 소문난 그 집 아시죠? 하하. 김 계장님도 같이 가십시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적성 고원 출생

-적성초(27회), 순창중(17회), 순창농림고(25회),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어학연수원(중국어),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관리과정 수료

-1981년 농수산부 행정사무관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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