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끈 28회
정해진 날짜가 계속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배씨 부부가 피할 방도를 찾아보겠다며 남원읍내로 갔다. 이틀 후 배씨가 다행히도 단비 같은 소식을 갖고 달려왔다. ‘한양에 살다 얼마 전 남원으로 낙향한 진내공 대감이 덕임의 소문을 듣고 데려와 보라하였다.’는 것이었다. 열나흘 저녁, 주씨 남매는 배씨와 같이 달빛을 받으며 밤새 걸어 새벽 동틀 무렵에야 남원 광한루 앞 다섯 칸짜리 기와집에 당도하였다. 그날 오후 늦게 진내공이 대청 상좌에 앉고 고수 배씨의 장단에 맞춰 주성지와 덕임이 춘향가를 열창하였다. 진내공은 한양에서 보고 듣던 것과는 다른 판소리에 반하였다. 그는 며칠 후 남원 부사와 휘하 의 현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고 판소리 한마당을 벌였다.
-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아매도 내 사랑아(춘향가 사랑가 중 일부) -
- 얼씨구나 좋구나 돈 봐라 돈 돈 봐라 으돈돈 돈돈돈 돈 봐라 돈, 이 돈을 눈에 대고 보면 삼강오륜이 다 보이고 쪼끔 있다가 나는 지화를(흥보가 돈타령 일부) -
헛물을 켠 운봉현감이 흙빛이 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뱃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먼저 떴다. 이튿날 저녁에 운봉현감이 보낸 이방이 성임을 찾아 와 엽전꾸러미를 놓고 갔다.
진내공은 원래 궁의 내시부 고위 내관이었다. 재산을 제법 모은 그는 한양 북촌에 서 여느 집처럼 아내를 두었지만 불구인 그의 곁을 다 떠나 버렸다. 그럼에도 늘 남들처럼 부인과 친자식을 둔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었다. 진내공은 평소 친하게 지낸 성민흥을 남원 부사로 영전하도록 힘을 써 주면서 ‘내시라는 것을 감추고 살려 하니 남원에 집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마침내 성 부사의 편지를 받은 진내공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궁을 빠져 나왔다. 이어서 전 재산을 정리하여 남원 광한루 앞 부근 큰 기와집을 구해 거처하였다. 성 부사가 입이 무거운 하인 부부를 진 대감에게 붙여 시중들게 하고, 친히 찾아가 사람들 면전에서 ‘진 대감님’이라 하며 공손히 대하고, ‘한양에 사는 부인과 자제의 안부’를 묻곤 하니 어느 누구도 그의 신분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진 대감이 바로 주성지 남매를 자기 집 행랑채에 거처를 마련하여 주고, 자기의 위세와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가끔 성 부사와 현감들, 토호 향리들을 초청하여 판소리 마당을 벌이곤 하였다. 성 부사가 덕임을 ‘은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지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 대감이 주성지와 은로의 판소리를 들으며 문득 두 사람이 친남매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급기야 주성지를 불러 다그쳐 따졌고 결국 주성지가 다 실토하였다. 다만 ‘사월이가 두 놈에게 농락당한 얘기’는 빼고, 둘이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연모하는 사이라고 밝혔다. 대감으로부터 둘의 사연을 들은 성 부사가 ‘보기 드문 일’이라며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성 부사가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빙긋이 웃었다.
“진 대감, 내가 드릴 선물이 하나 생겼소이다. 평생 갚아나가셔야 합니다. 허허.”
“예? 뭔데. 이리 뜸들이시오? 궁금합니다.”
“그게 말입니다. 귀 좀 빌립시다.”
진 대감이 벌떡 일어나더니 박수를 치고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성 부사에게 큰 절을 올리고 손을 굳게 잡았다.
“참으로 절묘합니다. 꿩 먹고 알 먹고, 일거삼득이로군요.”
진 대감이 주성지를 다시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 후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은로에게 청혼하였다. 언젠가는 사부 주성지와 한 몸이 되어 지내려던 은로는 내키지 않았는데, 주성지가 웬일인지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고, ‘따라야지. 어쩌겠어.’라는 말을 듣고 크게 상심하였다. 성 부사가 은로를 따로 불러 ‘양반의 정실부인’이 되는 것이라며 적극 권유하였다. 은로가 미심쩍어하자 성 부사가 ‘진 대감이 3년 전에 상처(喪妻)했다.’라고 말하며 얼버무렸다. 은로가 다시 주성지를 만났으나 알지 못할 표정을 짓기만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은로는 주성지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진 가운데. 천인 신분을 벗게 되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진 대감을 받아들이기로 정하였다. 그런데 첫날 밤, 뜻밖에도 진 대감이… 은로의 옷고름을 풀어 주지 않은 채 대청 건너편 멀리 뒷방으로 데려갔다. 금침이 깔려 있고 술상도 마련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거기에… 주성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둘은 듣게. 사실은 난 궁에서 내시로 지낸 사람이라네. 남원에서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성 부사와 너희 둘 뿐이니라. 너희들이 서로 연모하는 사이임을 내 알고 있었어. 다만,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는데…, 둘이 합방하여 자식을 하나 낳아 나에게 안겨 주면 어떻겠나? 자네들이 여기서 같이 지내도 무방하네. 내 주위와 아래에 어떤 누구도 없으니 내 죽은 후…, 그 아이가 곡(哭)을 해준다면…, 뭘 더 바라겠느냐?”
진 대감이 둘을 남겨 두고 안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은로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순간 주성지가 귀띔도 안 해준 것에 잠시잠깐 화가 났지만, 성 부사의 얼굴을 떠 올리며 감사와 더불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은로는 두 놈에게 능욕 당하고 죽으려 한 그녀를 살려주고 긴 세월 동안 돌봐주면서도 몸을 탐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려 준, 또 종년인 자신을 사람으로 대접해주고 재능을 인정하고 가르쳐 준 주성지에 대한 가슴속 깊은 감사의 마음과 물밀듯이 솟아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품에 안겼다.
“난 진 대감의 안방마님이 되어 딸을 낳았제. 돌잔치 때 성 부사가 이 애를 초연이라 이름 지어주었어. 초연을 애지중지 키우던 진 대감이 회갑을 지내고 몇 년 후 돌아가셨고, 열두 살 진초연이… 상복을 입었고 매년 대감의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네. 씨가 어디로 가겠는가? 우리는 이 아이에게 이제껏 판소리를 가르치며 지내왔어.”
“아아!. 정말 기막히고 대단한 일이었네요. 근데 지금 살아가는 형편을 보니…,”
“맞네. 성 부사님은 초연의 돌이 지난 얼마 후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가시고, 세월이 흘러 진 대감이 그리 가시니 사람들이 뿔뿔이 다 가 부렀제. 돈 좀 있는 양반들이 관심이 적어지니 푼돈도 만져보지 못하게 된 것이여. 자네 고숙(주성지)은 애초부터 재물에 관심이 없었어. 그저 친구와 어울려 한량처럼 지내고, 제자들이 머 돈들이 있어야 말이제. 점점 쪼그라들어 이처럼 가난한 신세가 되어…, 이 기와집이 이리 다 쓰러져 가고 있는데도 엄두를 못 내고 있지 않은가.”
“고모, 지가 뭐 도와 드릴 일이 없을께라우? 아버지가 예전에 꼭 찾아뵈라 당부하셨거든요.”
“많제만…. 그리 신세를 져야 쓰겄나? 다만, 우리 셋이 다 명창으로 소문이 났으니 제자를 기르며 지낸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집 꼴이 좀….”
“판소리를 내며 지내실 수 있도록… 제가 힘닿는 대로 도와드릴게요. 아, 그리고 그 아들 운복이는…?”
은로가 애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 애가 자네(인득)보다 한 살 아래일 거네. 지금 무주 지나 금산에서 지내. 손지가 둘이나 돼야. 지난 추석에도 안 왔는디, 먹고 사는 게 그런가벼.”
“그래요? 마침 제가 금산에 갈 일이 있어 올라가는 중입니다요. 간 김에 좀 봐야겠네요. 거기 갔다가 다시 올게요. 예!”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