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27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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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27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2.2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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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끈 27

관평 마을의 개간이 다 끝나자 명진이 인득을 불렀다.

소작농들도 정해졌으니 인자는 우리 둘 간의 얘기를 나누세나. 원래 자네 돈으로 땅을 샀으니 이제는 명의를 바꿔 가져가야 않겠나? 남은 돈은 이제 가져가게.”

명진이 공사일지와 비용 관련 장부를 폈다.

! 그거요. 어르신 머가 그리 급허신가요? 이 모든 일이 다 어르신이 주관허신 것이고, 지금은 소작농들이 땅을 기름지게 하고 또 열심히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 중요헌 거시고 우선 아니겠습니까요? 지금은 어르신 명의로 그대로 놔둬야 그 사람들이 잘 따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요?”

그래도 그건 아니 될 말이네. 우리 둘 사이에 무슨 문서가 오간 게 아니라 낭중에 시간이 지나다 보면 욕심이 생겨 자칫 분란의 소지를 낼 수 있단 말이네. 자네가 준 면천 비용으로 산 땅을 개간한 서른 마지기는 내 명의로 해도 되지만, 나머지 예순 닷 마지기는 자네 것이란 말이네. 안 그런가? 이 참에 다 명의를 바꿔 놓세나.”

. 맞긴 헌디요. 어르신의 역할이 참 크셨지라우. 그 걸 감안해야.”

에이, 무슨, 그거야 자네가 뒤에서 돈을 받혀주어서 된 거제. 여기 장부를 보게. 물길을 만들 때 들어간 돈도 대었잖은가. 내가 잘한 게 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뭐 감안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 이 사람아. 흐흠.”

아닙니다요. 하여튼 이 일은요, 소작료를 받게 되는 3년 후에 다시 의논하셔도 늦지 않을 거니 좀 기다리시라우. 어르신.”

 

인득은 관평에서 일했던 그 석축기술자들을 다시 사랭이로 데리고 와 손씨에게 붙여줬다. 민인을 동원하여 돌 자갈밭의 바위덩이와 돌을 옮겨 둑을 쌓으며 거의 3년 이라는 긴 기간이 지나 삼백여 마지기의 논이 만들어졌다. 인득은 손씨에게 약속한 대로 서른 마지기를 넘겨주고, 박씨에게는 이전에 소작으로 줬던 논을 이전시켜주고 따로 닷 마지기를 주었다. 인득은 직접 인부를 사 광작(廣作)할 수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소작지를 세 곳으로 나누고 박씨를 포함하여 손씨가 추천한 방가와 지가를 마름으로 정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관평의 예에 맞추어 소작을 내 주었다.

장장 5-6년에 걸친 개간사업으로 인득은 관평과 사랭이에 거의 사백여 마지기의 논을 갖게 되었다. 목포의 객주를 처분하여 받은 돈이 다행히 남아 있어서 당초 팔려고 매물로 내놓았던 한양 마포나루의 보부상 숙소와 가게들을 다시 거두어들이고, 영광의 객줏집도 그대로 두었다.

 

금산에서 홍삼을 만들어 한양으로 올리던 봉씨가 노환으로 결국 세상을 떴다. 인득이 문상(問喪)하기 위해 금산을 향하면서 이 홍삼공장을 처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며 올라가던 중 남원의 광한루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문득 옛적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 있는 고모가 생각나 말에서 내렸다. 다행히 명창 은로를 찾는 것은 쉬웠다. 밖에서 다섯 칸 기와집이 보였지만 안에 들어가니 다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은로의 가족들을 마주한 곳은 두 칸짜리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아버지 상진의 말대로 고모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한껏 무르익어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있었다. 딸 초연도 고모를 닮아 미목수려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싱그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인득이 우선 자기 가족들이 살아온 것을 대충 말해주고, 그들에게 그간 어찌 지내 왔는지를 물었다. 은로가 다소 미적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마님, 지금 가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황 진사 댁 회갑 잔치에 늦겠습니다요.”

주성지와 딸 초연이 일어섰다. 은로가 한 시진 후에 따라 가겠다하며 둘을 내보냈다. 은로가 밖에 나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조카 인득을 마주보았다.

이건 우리 부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얘기라네. 초연이도 모르제.”

은로가 옛 일을 회상하듯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이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인득이 바지춤을 끌어당기고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고모를 쳐다보았다.

 

그날 밤, 주씨와 사월은 채계산을 지나 비홍재를 넘었다. 주성지는 당시 주덕기, 송흥록, 모흥갑, 박유전 등 유명한 판소리명창들을 따라 다니며 소리를 같이 배우며 친하게 지냈던 옛 친구 배씨를 찾아 운봉으로 갔다. 부모의 유산을 받아 유복하게 지내고 있던 배씨 부부는 주성지의 여동생 사월이의 소리를 듣고 소리꾼으로 키우면 대성할 것이라고 말하며 사월이의 이름을 덕임이라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집 옆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근방 양반들의 잔치에 가 소리를 부르게 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배씨는 처음에 둘이 친남매인 것으로 알고 사월이를 소실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사월은 배씨 부인이 따뜻하게 동생처럼 대해 주고 있는데 배씨가 소실을 들이게 되면 그 부인의 슬퍼할 모습을 떠올리며 배은망덕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특히, 마음속으로 주성지를 깊이 연모하고 있어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의 자식을 낳고 싶은 생각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사월은 소실이 되고 싶지 않다.’고 완곡히 거절하고 배씨 부인에게 의동생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도리를 알고 인정이 많은 배씨는 사월이를 동생처럼 여기며 이름을 덕임이라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덕임이 사내아이를 낳자 주성지가 주저 없이 자기 자식으로 삼아 주운복이라 이름을 짓고 키웠다. 사실 주성지는 덕임을 동생으로 삼아 각방을 썼지만, 사내인지라 때론 마음이 동하여 또 본능에 못 이겨 덕임의 방을 찾았다. 하지만 덕임은 두만과 완보에 대한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 남자에 대한 혐오와 기피증이 남아 있었고, 또 망가진 몸이라 스스로 자책하며 몸을 사렸다. ‘아직은 주성지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내외를 하며 우연이라도 마주 대하지 않으려 했다.

어쨌거나 덕임을 사랑하는 두 남자 주성지와 배씨는 그녀를 제자로 삼아 정성을 들여 춘향가, 흥보가와 수궁가를 가르쳤다. 배씨는 둘의 득음(得音)을 위해 지리산 골짜기와 무주구천동의 폭포와 동굴에서 지내게 하고, 또 재능이 출중한 다른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며 서로 배우게 하였다. 덕임은 예전 종으로 살던 때 받았던 한()을 풀듯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인내하여 마침내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7년이 지날 무렵에는 덕임은 이미 미녀 명창소리꾼으로 소문이 나 남원 관내뿐만 아니라 멀리 곡성과 구례까지 퍼져 나가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소리에 재주가 있는 젊은이들이 주성지와 덕임의 소리를 배우겠다고 모여 들어 배씨의 집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당시 소리를 하는 여자가 드문 시절이라 사람들 특히 양반들의 호기심과 더불어 이목이 쏠리면서 여러 곳에서 그들을 자주 불러 소리판을 벌였다.

그런 그들에게 난감한 일이 하나 생겼다. 운봉현감이 덕임을 소실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정중히 거절하였지만 현감은 집요하게 다가와 일방적으로 다음 달 보름날로 날을 잡아 데려가겠다고 말하였다. 꾸며낸 춘향전 이야기 속의 변 사또가 실제로 변 사또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막무가내인 현감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그들이 운봉에서 소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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